항목 ID | GC0280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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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餘裕-高敞-樓亭文化 |
영어의미역 | Finding Free and Bueaty of Life - Gochang's Pavilion Cultur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후상 |
[개설]
누정이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의 합성어이다. 누정은 정자의 고유 명사인 정호에 누(樓)와 정(亭) 자가 붙은 건축물로, 주로 마루로 되어 있다. 참고로, 정호에 당(堂)이나 각(閣), 태(台) 등의 문자가 붙은 건축물이라 해도 마루가 주가 되어 사방으로 트인 건축물이라면 누정으로 본다. 한편, 누(樓)와 정(亭) 자가 붙은 정호라도 건축물의 구조가 방과 부엌 중심이라면 그것은 누정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누정은 전라도 지역에만 분포돼 있는 모정(茅亭)과는 또 다르다. 모정이 마을에 위치한 마을 일꾼들의 공동 쉼터였다면, 누정은 경관이 좋은 곳에 주로 선비나 동족 집단이 설립, 애용하던 공간이다. 따라서 누정은 유한계급의 사교장 역할을 했으며, 유한계급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진정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고창 지역의 누정 현황]
『전북향교원우대관(全北鄕校院宇大觀)』에는 고창 지역에 산재한 누정의 수를 무려 116곳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창 지역에 현존하는 누정은 그렇게 많지 않다. 참고로 관련 읍지(邑誌)에 나타난 고창 지역 누정의 대부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소개된 것들로, 건립 시기는 대부분 조선 전기다.
〈표-2〉에 나타난 고창 지역의 누정은 모두 36채[11개 터]다. 그런데 필자가 〈표-1〉과 〈표-2〉를 근거로 답사해 본 결과 고창 지역에 현존하는 누정은 모두 9채였다. 물론 근대 이후의 또는 사라진 누정은 앞의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는 〈표-2〉에 나타난 고창 지역의 누정 숫자보다 훨씬 적은 숫자다. 그 동안 사라진 누정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전북향교원우대관』에 나타난 116채는 지나친 숫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어느 지역보다 고창 지역의 누정과 관련한 기문(記文)과 제영(題詠)이 전통 시대 문헌에 다수 남아 있다. 따라서 누정을 중심으로 한 고창 지역 유한계급의 인문 활동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풍성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필자가 조사한 고창 지역의 누정 현황이다. 〈표-3〉에 소개된 것 말고도 숨어 있는 누정이 더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전통 시대의 누정들은 이와 같다. 이들 누정에는 기문과 시판(詩板)이 적잖이 걸려 있으나 훼손된 정도가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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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탄정
석탄정(石灘亭)은 1581년(선조 14) 석탄(石灘) 유운(柳澐)이 낙향하여 학문을 강의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석탄정이 있는 자리는 평야 지대에서 약간 솟아 오른 큰 바위산 자리다. 정자 앞은 천이 흐르고 주변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무성하다. 따라서 석(石)은 바위요 탄(灘)은 바위 앞을 흐르는 고창천을 일컬었을 것이다. 누정 동서로 각각 ‘상풍란(爽風欄)’과 ‘영월헌(迎月軒)’이라는 현판이, 서헌순(徐憲淳)·송병순(宋秉珣)등의 기문과 시 등이 걸려 있다. 옆에는 조석원(曺錫元)이 지은 유허비(遺墟碑)가, 뒤에는 술계당(述啓堂)을 고쳐지은 ‘상풍루(爽風樓)’가 서 있다. 석탄(石灘) 유운(柳澐) 이후에도 이곳 석탄정(石灘亭)은 낚시를 하고 문우와 더불어 풍월을 읊고 강마(講磨)하던 살롱이었다. 지금도 석탄정에서는 매년 한 번씩 시조대회가 열린다. 유명한 제영으로는 「석탄정(石灘亭) 십이경(十二景)」이 있다.
2. 취석정
고창 지역의 누정 중에서 전라남도 담양의 소쇄원 같은 정자 하나를 택하라면 취석정(醉石亭)을 택하겠다. ‘취석(醉石)’이란 중국의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에 취하면 집 앞 바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취석정은 사화를 피해 낙향한 광산인 노계(盧溪) 김경희(金景熹)[1515~1575]가 1546년에 세웠다. 김경희는 이곳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었으며, 제자들을 길렀다. 이곳은 한 동안 빈 터였다가 1871년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취석정은 목조 와가로서 부재가 견실하고 건물의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정자의 주위에는 토석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얹었으며, 정자에서 동쪽으로 일각문이 나 있기도 하다. 담장 안에는 7개의 지석묘가 산재해 있는데, 한 개의 지석 하부에 ‘취석정’이라 각인돼 있기도 하다. 담장 사이와 담장 밖에도 3개의 지석묘가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취석정은 담장 안팎의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와 함께 빼어난 조화를 이룬다. 또한 계류에 면한 소나무 숲도 그 멋을 더한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며, 중앙 한 칸에 구들을 시설한 방이 있으며, 사면에는 마루가 있는 평면 형태를 띠고 있다. 평면 형태는 호남 지방 정자 건축에 널리 수용된 보편적 형태다. 예컨데 폐쇄된 방과 개방된 마루가 어우러져 자연을 감상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 정신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잘 드러나 있다. 마루는 계자 난간만 시설하였다. 계자각 위의 하엽에는 태극과 팔괘가 각인되어 있다. 집을 소우주로 인식한 것이다.
죽산안씨들에 의해 세워진 오괴정(五槐亭)은 고수면 예지마을 뒤편 화강암반 위에 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정자에는 기문과 시판으로 가득하다. 다섯 그루 느티나무라는 의미의 오괴정 주변에는 노거수 7그루가 있다. 마을에서는 이 노거수들을 당산나무로 인식한다. 노거수 바로 옆에는 입석 1기가 세워져 있다. 정자 아래에는 연못이 있어, 지금도 연꽃을 볼 수가 있다. 죽산안씨 사람들에 따르면, “정자가 있는 암반의 모습이 거북을 닮았고 거북이가 연못의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거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거북의 머리 부분에 정자를 지었으니, 바로 오괴정이다.”라고 전했다. 정자 아래 암반에는 ‘일감당(一監塘)’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다. 정자가 세워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이라고 하니, 1,700년대로 보면 될 것이다. 정자 옆에는 특이하게 작은 모정과 같은 정자가 하나 더 있다. 이것 역시 오괴정과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오괴정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황산리 초입의 풍암정(豐巖亭)은 죽산인 무송당(撫松堂) 안군필(安君弼)의 후손들이 세웠다. 건립 연대는 1864년이며, 형식은 팔각정 형태의 홑처마다. 장두리의 쌍괴정(雙槐亭)은 1867년에 밀양인 박승현(朴升鉉)의 손자 양휴(陽休)가 세웠다고 한다. 형태는 팔작 지붕의 홑처마를 하고 있다.
4. 영취정
영취정(永翠亭)은 대산면 성남리 토성산(土城山) 아래에 있다. 정자는 육각형 형태를 띠고 있으며, 중앙 한가운데 구들을 시설한 방이 있다. 원래 구들이 있던 자리는 마루였다고 한다. 구들방 주변 육면에는 마루가 있다. 이곳은 원래 서죽헌(棲竹軒) 김첩(金渫)이 낙향해 초막을 짓고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때가 1800년경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과 화친한다는 소리를 듣고서 낙향한 서죽헌(棲竹軒)은 현 영취정 자리에다 초막을 짓고 이름을 ‘영취(永翠)’라 하였다. 서죽헌(棲竹軒)은 추운 겨울에도 변치 않은 정절을 사랑하며 은거했던 것이다. 현 정자는 김첩이 죽은 후 후손들이 세웠다.
5. 삼호정(三湖亭)
아산면 용계리의 삼호정은 옥천인 조인호(趙人湖)·덕호(德湖)·석호(石湖) 형제가 세웠다. 주진천[인천강]의 맑은 물이 굽이 돌아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뤄, 역대 고을 수령들이 자주 찾던 경승지로도 유명하다.
6. 기록으로만 전하는 누정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빈풍루(豳風樓)는 객관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객관 북쪽이라면 고창읍성 내 객사 뒤쪽이 되겠고, 그렇다면 지세가 높은 성의 서북쪽 성황당 부근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무장의 동백정(冬栢亭)은 현의 서쪽에 있는데, 삼면(三面)이 바다에 임해 있다고 하였다. 삼면이 바다에 임해 있을 성싶은 곳은 지금의 구시포 인근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배풍헌(培風軒)은 객관 서쪽에 있다.”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배풍헌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흥덕객사 서쪽인 선운사 가는 신작로 주변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배풍헌(培風軒) 자리는 배풍산 서쪽 자락일 가능성이 크다.
호산정(湖山亭)은 강응환(姜膺煥)의 출생지인 성송면 암치리에 있던 누정이다. 신림면 가평리의 만정(晩亭)은 경승이 아름다워 「만정(晩亭) 십이경(十二景)」이 읊어졌다고 한다. 이곳은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鎭)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현판이 남아 있는 누정으로는 무장객관 남쪽에 자리한 찰미루(察眉樓)이다. 1666년(현종 7)에 무장현감 김하외(金廈嵬)가 세웠다는 찰미루는 일제 강점기에 헐렸다고 전한다.
7. 읍성 안의 누정들
고창읍성의 누정으로는 읍성의 일부인 공북루(控北樓)가 있다. 물론 공북루를 누정으로 보지 않는 이도 있으나, 필자는 넓은 의미의 누정에 포함시켰다. 1676년(숙종 2)에 건립되어 1852년(철종 3)에 중건된 공북루는 읍성 북문의 누각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누의 사방 둘레에 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기둥의 아랫부분은 화강암으로 받쳐져 있다. 주초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덤벙주초다.
무장읍성의 일부인 진무루(鎭茂樓) 역시 원래 무장읍성 남문으로 축조된 것이다. 건물의 건립 연대는 1581년(선조 14)이 아닌가 추정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누는 지상에서 195㎝ 위에 설치되었고, 누의 가장자리에는 난간이 둘려져 있다.
[기문(記文)과 제영(題詠)을 통해서 본 고창의 누정]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창 지역의 누정 관련 기문(記文)과 제영(題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누정은 대부분 현존하지 않는다.
1. 고창현 누정
현존하지는 않지만 기록에 또는 명문으로 전해지는 누정은 상당수 있다. 그 가운데 고창읍성[일명 모양성]에 있었던 빈풍루(豳風樓)에 관한 기문은 당시 수령의 애민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동문선(東文選)』‘기(記)’에 나타난 정이오(鄭以吾)의 「고창현 빈풍루기(高敞縣豳風樓記)」는 다음과 같다.
“고창은 본시 산수가 아름답다 일컬었고, 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五穀)에 알맞다고 하였다. 지난 무술년 여름에 이후(李侯)가 현감이 되어 왔었는데, 이듬해에 풍년이 들고 사람은 화평하며 정사는 맑고 일은 간편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공관이 비좁아서 사신이 오면 답답한 심정을 풀고 맑은 기운을 마실 만한 곳이 없었다. 항상 걱정하던 나머지 드디어 옛날의 정자 터를 다듬고 몇 칸의 누를 세워 시냇가에 임하게 했는데, 벽 바르고 단청하는 것까지 모두 두 달이 걸려서 완성을 보게 되었으며, 바라보면 날 듯하였다. ……누의 경치는 하나만이 아니라 누의 흥미는 벼가 많은 데에 있으니, 감히 청컨대 이름을 빈풍(豳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1419년(태종 19)에 당시 고창현감이던 한산인(韓山人)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들 이종문(李種文)이 성(城) 내의 무명 누각이 허술하기 짝이 없으므로 이것을 헐고 새 누각을 세웠다. 이때 진주인(晉州人)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1364~1434]가 누각의 기문을 짓고 이름을 빈풍루라 하였다.
2. 무장현 누정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무장현의 누정은 객관 북쪽에 있는 아관정(迓觀亭), 현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동백정(冬柏亭), 그리고 객관 동쪽에 있는 신루(新樓) 등이다. 아관정에는 정곤(鄭坤)의 기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고을은 전라도의 서쪽에 있고 큰 바닷가에 있는데, 고려 후기에 왜적이 한창 설치어 백성이 생업을 잃고 흩어져서 쓸쓸히 온통 빈 지가 오래더니, 지금 우리 성조(盛朝)에서 성신(聖神)이 계승하시어 안으로 정사를 닦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것이 법도가 있으니, 바닷가 고을의 민생이 번성해졌다. 이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해서 한 고을로 하고 여기에 진(鎭)을 설치하여 어질고 재간 있는 사람을 가려 주장(主將)을 삼아 변방을 굳게 하고, 이에 두 현 중간에 땅을 선택하여 성을 쌓아 백성을 살게 하고, 창고와 청사와 군영 또한 모두 자리 잡도록 하였다. 지금 절제사 송유인(宋有仁) 공은 진지한 군자이다. 기유년 봄에 대호군으로부터 명을 받고 이 진에 절제사로 왔는데, 군정(軍政)은 진흥되고 민사는 다스려졌으며, 또 풍년이 들었다. 이에 더운 철에 손님을 맞을 곳이 없고, 무예를 시험할 때 활을 쏠 만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여, 마침내 객사 북쪽 높은 언덕 위에 한 정자를 지었는데, 제도가 굉장하여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혹은 활쏘기를 익히기도 한다. 그래서 아빈(迓賓)의 아(迓)와 관덕(觀德)의 관(觀) 두 글자를 따서 아관(迓觀)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백정은 현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져 있으며 산기슭이 바다 안으로 쑥 들어갔고 3면이 모두 물인데, 그 위에는 동백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몇 리나 뻗어 있다. 이는 호남에서 다시없이 경치 좋은 땅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동백정에서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시를 읊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라 머리에 수많은 나무 찬란히 붉은데/ 술잔 들고 숲 사이에서 함께 흉금을 트네/ 한 조각 아기(牙旗)에 비취(翡翠)새 놀라고/ 몇 마디 쇠젓대 소리에 고기와 용이 춤추네/ 누런 띠 밭 질펀한 곳에 농사가 한창이요/ 푸른 안개 짙은 곳에 섬이 겹겹일세/ 지금 성대라서 변방이 고요하니/ 수령이 잠깐 노니는 것도 무방하리라.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루(新樓)는 객관 동쪽에 있다. 현감 최검(崔儉)이 이를 고쳐 짓고 읍취(挹翠)라 이름 지었다.”라고 나와 있다. 여기에서 안침(安琛)이 시를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누각 아래 연못에는 물이 깊고/ 뜰 앞의 나무엔 녹음이 짙었네/ 이곳에 민정을 살피러 왔고/ 도독은 당년에 계극(棨戟)[관리가 출행할 때 앞에 들고 가는 것]이 임하였네/ 때가 태평하니 하상(河上) 군사가 괴롭지 않고/ 풍년이 들어 읍중(邑中)의 검(黔)을 뒤로 하겠네/ 조용히 술자리 여니 다른 일 없고/ 불자(拂子)를 흔들며 청담(淸談) 하는 데에 날이 벌써 저물었네.
대산면 성남리 토성산(土城山) 아래의 작은 정자 영취정에서도 적지 않은 제영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밀양인(密陽人) 박노열(朴魯烈)의 제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날씨는 추워도 대나무 숲은 푸르니[歲寒諸子自成林]
높고 높은 기절은 예나 지금이나[氣節巖阿古有今]
바람이 불적마다 생황 소리 들리는 듯[風到海時笙奏樂]
구름 깊은 한밤중에 학의 울음소리[雲深子夜鶴鳴陰]
이웃까지 뻗은 대나무 천 겹이나 빽빽한데[此隣密邇蕂千障]
서로 어우러져 열 길이나 되네[與友琅玕竹十尋]
김씨 집안에서 이 대나무 대대로 전하니[金氏家中用以世]
백발이 되도록 앉으나 서나 얼마나 읊었을고[幾多行坐白朝吟]
박노열의 제영은 서죽헌의 대나무 같은 절개와 충정을 흠모하였는데, 영취정의 다른 제영 역시 서죽헌의 절개를 노래하고 있다. 이곳 영취정은 유식자들이 모여 시국을 논하고 충정을 가다듬는 이른바 정신 교육장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객관 남쪽에 있던 찰미루(察眉樓)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현판은 남아 있다. 당시 현감 김하외(金廈嵬)의 「찰미루정기(察眉樓亭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장사(長沙)로 와서 마침 2년에 남쪽 청방(廳房)을 영건(營建)하고 옛 주초(柱礎)로 인해 동쪽에 작은 누정을 일으키니 무릇 여섯 기둥 누정이라. 낙성하여 찰미(察眉)로 편액함은 두자(杜子)[두보(杜甫)]의 ‘창생가찰미(蒼生可察眉)[백성들의 미간을 살펴야 한다는 뜻]’의 말에서 취했도다. ……슬프다. 위정자가 누군들 백성으로 하여금 근심 없게 하고 싶지 않을까마는 뜰아래에서 스스로 펴 있는 백성은 거의 없고 몇 있을 뿐인데 백성들의 근심 있는 것을 어떻게 그 미간을 살필 것인가. 오늘에 내 이 다락에 올라 그 미간을 살펴보면 백성들의 근심 있누 또 없는 것이 다 내 눈 속에 들어오리니 어찌하여 근심 있는 자가 많고 근심 없는 자가 적겠는가. 이에 숙연히 놀라고 소연(疏然)히 두려워 그 근심을 덜고 그 미간을 펴도록 하려고 생각하면서 또 후일 이 다락에 오르는 이를 기다리노라.”
「찰미루정기」는 중국 소식(蘇軾)[1036~1101]의 「희우정기(喜雨亭記)」를 떠오르게 한다. 관아의 대부분의 정자 기문이 그러하듯이 「찰미루정기」에도 ‘목민자의 고뇌’가 담겨져 있다.
3. 흥덕현 누정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흥덕의 누정은 배풍헌(培風軒)으로, “배풍헌은 객관 서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풍헌 제영을 통해 당시 인물들의 시를 볼 수 있는데, 정창손(鄭昌孫)과 김종직(金宗直), 유순(柳洵), 남곤(南袞), 박휘겸(朴撝謙)등이 지은 시를 차례로 보자.
바다 곁한 큰 고을[雄藩]은 푸른 산봉우리 대해 있고/ 구름 찌를 듯한 누대는 우뚝하게 바람을 임하네/ 외로운 배는 사양(斜陽) 밖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먼 산구멍은 구름 속에 아물아물 한다/ 한밤에 나팔소리 달그림자 흔들고/ 한 난간의 꽃 빛은 봄 경치 곱게 하네/ 바다는 큰 물결 몰아가서 고요한데/ 물 넓고 하늘 길어 보는 눈이 통한다.[정창손 작]
백치(百雉)의 높은 성 천 길의 봉우리라/ 올라보니 몸은 마치 영풍(泠風)을 탄 듯하네/ 노는 사람 웃음소리는 성누 밖에 들려오고/ 갯가의 돛단배는 저녁노을 가운데 떠 있다/ 한 길은 동서쪽으로 어찌 그리 아득히 먼가/ 두 세상 높낮음 저절로 흐릿하네/ 오사모(烏紗帽) 반쯤 벗고 깊은 생각 잠겼다가/ 묻노라 황혼(黃昏)아, 북소리 몇 번 울렸나.[김종직 작]
높은 쌍 깃발 걷고 푸른 봉에 머무르니/ 여덟 창엔 공중 바람 모두 들어온다/ 연기와 묏부리는 난간 밖에 점점이 보이는데/ 구름바다는 손가락질하여 돌아보는 가운데 가물가물 한다/ 아침 해 오를 때는 맑고 시원한 것 더하더니/ 저녁 안개 잠긴 후엔 가장 침침하여진다/ 올라 보니 난새[鸞]를 타고 가는 공상에 스스로 만족하여/봉래(蓬萊)·영주(瀛州) 가는 길 통한 듯하다.[유순 작]
깎아 세운 듯 잇닿은 천 만 봉인데/ 아지랑이 하루살이는 큰 바람에 막혀 있구나/ 한 지역 좋은 풍경은 난간 밖 아침이고/ 두어 점(點)의 제주(濟州)[중국을 말하는 것]는 눈에 보이네/ 별포(別浦)의 조수 소리 어지럽게 떠들고/ 석양의 산 기운은 멀리 부옇구나/ 채색 붓 없는 내가 그림으로 그릴 수 없어/ 앞의 글제 주워 모아 회통(會通)[모아서 하나로 합친 책]을 만든다.[남곤 작]
정정(亭亭)하게 우뚝 솟은 만길 봉우리/ 봉 꼭대기 높은 누각 먼 바람에 임하였네/ 땅은 봉도(蓬島) 삼청(三淸) 경계에 연하였고/ 사람은 소상팔경(潚湘八景) 가운데 있다/ 구름은 산허리를 두르고 아득하게 비꼈고/ 물은 하늘 그림자 머금고 뿌연 하늘에 닿았네/ 홀연히 먼 포구 바라보니 돌아오는 돛단배 빠르고/ 뱃길은 멀리 이어져 한수(漢水)로 통한다.[박휘겸 작]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바다와 연해 있는 배풍헌과 배풍헌에서 느길 수 있는 바람과 구름, 노을과 달 그림자, 그리고 쓸쓸하다 못해 외로워 보이는 고깃배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려져 있다. 옛 사람들의 잔잔한 멋과 절제된 아름다움이 한껏 깃들어져 있다.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정리한 글은 고창 지역의 누정과 관련한 기초 조사 자료에 불과하다. 향후 누정의 건축사적 고찰이나 누정에 얽힌 유래 등을 더욱 궁구해야겠지만, 우선은 훼손의 위험에 처한 기문이나 시문 등이 담긴 시판을 모으는 것이 시급하다. 시판에 나타난 명문을 해석하고 분석하여 전통 시대 지역 사회에 형성된 문파나 문맥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문 활동을 살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고창 지역에는 담양의 소쇄원처럼 자연 경관을 적극 활용한 널따란 누정, 즉 원림과 같은 형태는 없다. 즉, ‘경치 좋은 곳에 누정과 같은 건축물만을 축조하지 않고 이곳에 계획적인 구도 아래에서 최소한의 인위적인 힘을 이용하여 자연물을 조성’한 원림(園林)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동족 마을이나 종족 집단의 제실 또는 사우 등지의 부근에 누정을 지어 충절을 노래하고 제영들과 교우를 한다든지, 또는 후학을 돕는다든지 하는 인문 활동은 활발하였다. 이러한 인문 활동이 활발했던 곳 중의 하나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된 김기서 강학당(金麒瑞講學堂)이다. 고수면 상평리에 자리하고 있는 김기서 강학당은 기묘사화 직후에 낙향한 김기서가 후진을 양성할 뜻을 펼치기 위해 1548년(명종 3)에 세웠다. 물론 김기서 강학당은 누정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누정의 기문과 시문 등이 문전에 많이 남아 있다는 것과 더불어 현존하는 취석정, 석탄정, 삼호정 등의 여러 제영은 전통 시대의 고창에서 인문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