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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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俗工藝 |
영어음역 | minsok gongye |
영어의미역 | folkcraft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이한길 |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생활용품을 대상으로 하여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킨 민속품을 만드는 기술.
[개설]
예전엔 민속품이란 우리 생활의 일부분으로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하여 기계가 만들어내는 대량 생산의 홍수 속에 일일이 수작업으로 생활필수품을 만들던 방식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나마 몇 안 되지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몇몇 있어서 아직도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데, 강릉에도 이러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몇몇 있다.
[역사와 변천]
강릉은 유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민속공예가 있어왔다. 현재 가장 대표적인 민속공예로는 김영락(金映洛)[1920년생] 명인이 만드는 참방짜수저가 있다.
김영락 명인은 3대째 가업을 계승해오고 있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4월 25일에 강원도 무형 문화재 제14호 ‘방짜수저장’으로 지정받았다. 김영락 명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연도 많았다. 한 번은 가업을 중단한 적이 있었는데, 꿈에 조상이 나타나 가업을 이어라 선몽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에 다시 가업을 이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현재 그의 아들인 김우찬이 전수 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본래 방짜란 쇠를 두드려 만드는 방법인데, 일반적으로 대장간에서 대장장이가 쇠를 두드려 만드는 방법과는 철학이 다르다고 김영락 명인은 강조한다. 징과 꽹과리, 유기 그릇 등은 놋쇠를 이용은 하되 방짜 기법은 아니라는 말이다. 질 좋은 구리와 상납[주석]을 구리 1근[16량]당 상납 4.5량의 비율로 녹인 후에 손가락 크기보다 조금 길게 홈이 파인 무디판에 부어 식혀 무디가락을 만든다. 이 무디가락 한 개가 수저 한 개 분의 원료로 이것을 숯불에 알맞게 달구어 머루돌에 올려놓고 위와 아래를 뒤집어 가면서 두 사람이 망치로 번갈아 두들기면 숟가락 모양이 잡힌다.
그 후 숯불에 15회 이상 담금질을 되풀이하여 두드리면 쇠는 조직이 치밀해져 강도가 높고 광택이 나게 된다. 이때 불에 너무 달구면 두들기는 동안 쇠가 해지고 너무 식으면 쇠의 찰기가 적어져 쇠가 깨지고 만다.
망치 자국이 울퉁불퉁한 숟가락을 나무틀에 고정시키고 호비칼[쇠칼]로 불에 익은 때를 벗겨내면 반짝이는 놋쇠의 살결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이 줄질을 거듭하며 자루와 자루 끝에 죽절(竹節)이나 연봉(蓮蓬) 등의 조각을 가해 숟가락 하나를 완성시킨다.
방짜 숟가락은 그 생김새에 따라 크게 4가지로 구분해 부른다. 망치 자국이 남아 있는 거친 막수저, 무늬 없이 두툼한 온간자, 가늘고 약한 반간자, 자루 끝에 무늬가 새겨진 꼭지 수저로 구분한다. 김영락 명인은 방짜수저 중에서도 자루에 죽절문(竹節紋)을 새기고, 끝에 연봉을 한 연봉수저를 잘 만들어 내었다.
김명인에 의하면 방짜 중에서도 참방짜여야 한다고 한다. 참쇠로 만들고, 참빛을 띄고 참소리가 나고 참모양을 이루고 참뜻을 얻어야 참방짜가 된다고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그냥 방짜일 뿐이라 강조한다. 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부터 그 근본개념이 형성되었고, 방은 동서남북의 방위 개념에서 그 개념이 역시 형성되었다. 그 참과 방의 교호에서 구리와 상납의 혼합 비율이 정해지기에 진정한 방짜로 만든 수저는 가벼우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창세기공예를 운영하고 있는 김남수는 강릉 토박이로 가업으로 물려받은 것이 목공예였다.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부친(90세)은 원래 구두골[구두를 만드는 데 필요한 나무 모델]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한국 전쟁을 만나 대전 지역으로 피난을 가면서부터 절구, 함지, 방망이 등 목공예로 바꾸었는데, 한때는 절구를 잘 만든다고 하여 ‘절구 김씨’란 별명을 들었고, 또 한때는 다듬이방망이, 만두방망이, 물방망이 등 방망이를 잘 만든다고 하여 ‘방망이집’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절구와 방망이를 만들어 그 희소성이 떨어지자 김남수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보자 하여 함지에 매달리게 되었다. 지금 함지를 만드는 이는 전국적으로 보아 김남수가 유일하다. 또 이곳에서 만드는 장구는 굿장구라 하여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통장구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통장구는 몸체가 분리되지 않으나 굿장구는 분리할 수 있는 것이어서 전문가들이 즐겨 찾는다.
예림원 대표 김순덕은 강릉으로 시집온 후 사임당의 고장인데도 불구하고 전통 자수의 맥이 약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 이후로 전통 자수의 보급과 기반조성에 노력하였다. 1970년대에 ‘꽃수예’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는 1985년에 강릉 전통 자수회로 개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신세대들도 가입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강릉 전통 자수회’는 우리 전통 자수의 예술 작품화와 현대 생활화에 노력해왔으며 아울러 전통 자수의 보급과 계승을 위한 노력도 계속해왔다.
김순덕은 전통 자수로써 강원도 및 전국 공예품 대전에서 십여 회 이상 수상했고, 무궁화 자수 윷판으로 강릉시 특허를 획득한 바 있으며, 또한 2003년도에는 전국 기능 경기 대회 수자수 심사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면 우리 선조들이 풀과 벌레를 관찰하여 그 신비로움과 무한한 조화를 깨닫고 아름답고 오묘하게 표현했는데, 김순덕이 운영하는 예림원에서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병풍」을 완벽하게 재현하였다. 또한 전통 자수의 기법과 문양을 오늘에 되살려 다양한 경대, 구절판, 약장, 차주머니, 가방 등의 생활용품 및 사주보, 예단보, 혼서지 등 혼례 용품 등에 접맥하여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강릉시 공예 협회장을 역임 한 이승선은 다식판, 떡살, 약과판 등을 20여 년째 만들어오고 있다. 이런 민속품 등은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의 고유문화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거의 강제적으로 불타 없어졌던 것이었는데, 이승선은 우연한 기회에 음식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후부터 줄곧 민속자료의 복원에 힘써왔다. 그동안 판로가 개척되지 않아 상당히 경제적으로 부담은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 사회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음식문화를 되살리자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예전보다는 관심이 제고되고 있다.
선교장 내에서 목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영곤은 강릉에 정착한 지 10여 년 안쪽이지만, 장승과 솟대, 남근 등 목공품을 만든 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 민속공예는 전통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은 있으나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건비 등 경제적 문제에 봉착해 계속 일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예를 들어 윷을 만든다 하더라도 하루 품이 소요되는데, 그렇게 만든 윷을 몇 만 원씩 받으면 팔리겠냐는 뜻이다. 그래서 강릉에서 목공예를 하는 분들은 대부분 조각품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보다는 생업이 더욱 중요한 생활인이기 때문이다.
강릉은 단오제라는 중요무형 문화재가 있어 또 2005년에는 세계가 인정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었다. 당연히 단오와 관련한 여러 민속품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속품들이 값이 싼 중국산이거나 강릉이 아닌 외지에서 들여온 것이 많다. 이처럼 민속공예의 전통을 유지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강릉의 주요무형 문화재인 「관노가면극」 놀이에 사용되는 관노가면탈 역시 지금은 만드는 곳이 없다. 예전에 선교장 내에서 목공방을 운영했던 정운복이 관노가면탈을 만들었던 마지막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