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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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 |
영어음역 | Hyoja |
영어의미역 | Hyoja|dutiful son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전통시대 안산 지역에서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한 자녀.
[개설]
효(孝)는 예로부터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강조되었으며, 가정질서의 기본이 됨은 물론 국가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되었다. 효에 대하여 『소학(小學)』에서는 ‘부모를 지성으로 섬기는 것’이라 하였고, 『논어(論語)』에서는 ‘예(禮)에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또한 『효경(孝經)』의 첫 장에서는 몸과 머리카락과 피부는 부모한테서 받은 것이니 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며, 열심히 노력하여 출세함으로써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침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효는 부모가 살아서는 봉양을 다함은 물론 돌아가신 후에도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제사 드리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모 생전에 잘 모시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효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라는 시조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을 인륜의 근본으로 삼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효녀 지은(知恩)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자신이 스스로 부잣집 종이 되고, 그 대가로 얻은 쌀로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내용의 대표적인 효의 사례이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더욱더 효를 권장하고 아울러 포상도 실시하였다.
즉, 세종 때 충신·효자·열부(烈婦)에 관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전국에 보급하여 효열(孝烈)을 장려하였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효자·효손 등 선행을 한 자는 해마다 예조에서 조사·보고하도록 하였다. 또 이들에게 관직이나 물품을 내리거나 특이한 행실이 있으면 정려(旌閭)를 세워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효자에 대한 행적은 문집이나 읍지류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짐으로써 가문의 자랑거리가 됨은 물론 불효를 경계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를 통하여 효자에 대한 표창과 효를 중요시한 전통은 전국 각지에서 많은 효자를 탄생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효자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효녀(孝女)·효부(孝婦), 조부모를 잘 받들어 모신 순손(順孫) 혹은 효손(孝孫) 등이 있다.
[효자]
안산 지역의 효자에 대한 기록으로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최우성(崔宇成)이 있다. 이후 편찬된 『안산군읍지』에는 김충주(金忠柱)·김경남(金景南)·김약전(金約前)·이상기(李相夔)·김계창(金啓昌)·김정훈(金鼎勳)·김달명(金達命)·김동려(金東礪)·김동은(金東殷)이 기록되어 있고, 효부로서 김달명의 아내가 수록되었다. 이밖에도 안산에는 김귀만(金貴萬)·김성대(金聲大)·김성발(金聲發)·김성옥(金聲玉)·김세철(金世哲)·김여규(金汝逵)·김여우(金汝遇)·김처곤(金處坤)·신용남(申龍男)·홍정희(洪貞羲)·홍소저(洪小姐)의 효행이 전해진다.
[효행]
『안산군읍지』 등에 나타난 효자들은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늘을 감동시켜 얻기 어려운 물건을 구하거나, 부모가 병환이 났을 때 변을 맛보아 병을 가늠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사경을 헤매는 부모를 살리는가 하면, 부모 사후에는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르는 등 효자로서 전형적인 행적을 나타내었다. 특히 김충주·김경남·김약전은 대를 이어 효자 정려를 받음으로써 안산을 대표하는 효행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충주는 세조 때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의 손자이다.
[관련 문화재]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에 위치한 오정각(五旌閣)은 김문기·김현석(金玄錫) 부자의 충신 정려와, 이후 김약전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친 충효 정문을 모아놓은 곳으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