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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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忠柱 |
영어음역 | Gim Chungju |
이칭/별칭 | 광보(狂甫),탄옹(炭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신대광 |
[정의]
조선 전기 안산에 은거한 선비.
[가계]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광보(狂甫), 호는 탄옹(炭翁). 할아버지는 김문기이고, 아버지는 거창현감을 지낸 김현석(金玄錫)이며, 어머니는 동복오씨이다.
[활동사항]
김충주(金忠柱)[1444~?]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이에 형 김충립(金忠立)과 함께 영읍(嶺邑)의 노비가 되었다. 이에 김충주 형제는 이름을 김철주(金哲柱)·김원희(金元希)로 고치고 잠적하였다. 김충주는 형과 헤어져 태백산 아래 신두곡(新杜谷)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김충주의 행적을 의심하자 다시 안산군 광곡리(廣谷里)[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너빌마을]에 이르러 은거하였다.
풀을 엮어 집을 짓고 숯을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스스로 아호를 탄옹이라 하였다.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마의(麻衣)에 평립(平笠)을 쓰고 다녔다. 집 뒤에 한 개의 바위와 그 아래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소나무와 더불어 마음을 달랬고 단종에 대한 충성심이 변할 때마다 바위에 올라 단종의 묘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명에 숨진 것을 몹시 슬퍼하여 아침저녁으로 소나무 곁에서 눈물을 흘리자 이에 소나무도 말라 죽었는데, 그 뒤 1827년(순조 27) 김충주의 9세손 김처일(金處一)[1779~1853]이 그 자리에 고송정(枯松亭)이란 정자를 지었고 바위를 망월암(望越岩)이라 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고송정지 뒤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51년(철종 2) 김처일의 아우 김처락(金處樂)[1796~1872]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힘을 모아 너빌마을에 세덕사(世德祠)를 세워 김충주의 효행을 추모하였다. 이듬해 김충주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1870년(고종 7) 정려가 내려져 오정각에 봉안되었다. 단원구 화정동 산58번지에 위치한 고송정은 1992년 사업비 5,130만 원을 들여 전면 중수하여 1995년 10월 준공식을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