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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778
한자 金文起
영어음역 Gim Mungi
이칭/별칭 여공,백천,마암,김효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명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북도 옥천
성별
생년 1399년연표보기
몰년 1456년연표보기
본관 김녕
대표관직 이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여공(汝恭)이며, 호는 백촌(白村)·마암(馬巖). 처음 이름은 김효기(金孝起)였으나, 장인의 이름이 효정(孝貞)이어서 문기로 고쳤다. 영의정에 추증된 김관(金觀)이 아버지이고, 그의 아들 김현석(金玄錫)은 영월군수로 재직 중 아버지와 함께 순절하였다.

[활동사항]

김문기는 1399년(정종 1) 충청북도 옥천에서 출생하였다. 142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렀다. 그 뒤 예문관검열·사간원좌헌납을 거쳐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병조참의·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공조판서겸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은밀히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김질(金質)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자 김문기를 비롯하여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 등은 체포되었으며, 유성원(柳誠源)은 자결하였다. 김문기는 모진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백촌유사(白村遺事)』는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한 김문기의 유사(遺事)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한편 『백촌선생문집(白村先生文集)』은 김문기의 시문집으로 1928년에 후손 김연석(金淵錫) 등이 간행하였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1동 185-2번지 사육신공원에 가묘가 설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731년(영조 7) 김문기의 후손 김정구(金鼎九)의 청으로 복관(復官)되고, 1778년(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정할 때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과 함께 3중신으로 선정되었다. 김천의 섬계서원(剡溪書院)과 사육신공원의 의절사(義絶祠) 등에 제향되었다.

또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58번지[오정각길 35]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 김충주[김문기의 손자]·김경남[김문기의 증손]·김약전[김문기의 현손]의 효자 정려 등 5대에 걸친 충효 정려가 있다. 한편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사육신 문제에 대한 심의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의결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위의 글을 보면 비방의 글입니다.
삭제 요청 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7.01.12
홍* 국사편찬위원회

수신자 서울특별시장

(경유)

제목 서울시의 사육신 관련 질의에 대한 회신

1. 귀기관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

2. 보내주신 질의 내용에 대해 다음과같이 답변 드림니다

1)국사편찬위원회는 1982,11,11일 합의사항에서 "종래의 사육신 구성을 변경한바 없음"을 확인한바 있습니다

2)국사편판위원회에서 변경한 바 없다고 한 사육신의 구성원은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의 6인입니다. 끝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관인)

편사연구관 이순구 편사연구관 김대길 부장
2011.06.01
홍* 역사를 권력과 힘으로 바꾸려는 후손들을 둔 실록에 삼중신으로 올라있는 김문기는 참 좋겠습니다.
조상을 깍아내리는짓이 맞지요?
2011.05.20
홍* 이것은 아마도 아무리 무도한 김문기 후손이라 해도 숙모지 기록이 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김문기 위패를 끌어내려 사육신 자리에다 놓는다는 것은 저들 마음속으로도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조가 성삼문을 문초할 때. 너는 숨기는 바가 있어선 안 될 것이다. 네 죄의 경중이 나에게 달려 있다.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과 함께 모의 했습니다. (汝不可有所隱 對曰臣實與 朴彭年,李塏.河緯地,柳誠源同謀)

이 문답에서도 김문기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세조가 재차 물었다 모두 실토하라고 다그치자 성삼문은 유응부 박쟁도 알고 있습니다. (上曰非特此也 汝宜盡言 對曰 兪應孚 朴崝知之)

이 문답에서도 김문기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2011.05.20
홍* 왕조실록상 사육신의 한 분이다.



이 말은 새 빨간 거짓말이다. 김문기는 분명히 왕조실록상 민신, 조극관과 함께 삼중신의 한 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공주 숙모전의 서무에도 민신, 조극관 다음 여섯번 째로 삼중신의 위패로 모셔져 있다. 이것만 보아도 김문기는 삼중신이지 사육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숙모전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참 재미있고, 이상한 일은 김문기 후손들이 왕조실록상 사육신의 한 분이라고 우겨대면서 왜 이 숙모전의 김문기 위패만 상중신 마지막 위치에다 그대로 놔두고 있는가이다

그 무도한 김문기 후손들이 왕조실록상 김문기가 사육신이라면 의당 그 위패가 사육신 자리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자들이 이 숙모전의 김문기 위패만 삼중신의 마지막 위치에다 그대로 방치했느냐이다.

이것은 아마도 아무리 무도한 김문기 후손이라 해도 숙모지 기록이 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김문기 위패를 끌어내려 사육신 자리에다 놓는다는 것은 저
201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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