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243
한자 三國抗爭
영어음역 Samguk Hangjaeng
영어의미역 Conflicts between the Three Kingdom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강민식

[정의]

충청북도 청주를 중심으로 한 삼국간의 항쟁.

[개설]

교통의 요충지인 청주를 빼앗기 위한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항쟁으로 청주지역을 최종적으로 획득한 신라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427년(장수왕 15) 고구려의 평양 천도와 함께 남쪽으로의 진출을 강화하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를 방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백제개로왕이 전사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금강을 경계로 백제와 고구려는 치열한 대립을 계속하였고, 신라는 이 틈을 이용하여 점차 영역을 확대하게 되었다.

551년(성왕 29, 진흥왕 12) 백제와 신라는 연합 작전으로 백제의 옛 영토였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으나 신라는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하류마저 차지하였다. 이에 백제와 신라는 다시 대립하게 되고 삼국통일 전까지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발단]

4세기 후반 고구려는 백제의 공격으로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하자, 5세기 들어 백제에 대한 끊임없는 보복 공격으로 이어진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을 저지하면서 신라와의 연합을 도모하였다.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영토를 확장해 가면서 고구려와 백제와 경계를 마주보게 되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입하여 개로왕을 전사시킨 뒤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위기에 빠진 백제는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고 금강을 경계로 하여 고구려와 대치하게 되었고 신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신라는 이미 5세기 후반 소백산맥을 넘어 470년 보은 삼년산성을 쌓아 금강유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5세기 후반 청주지역은 삼국의 군사력이 집중된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각기 주변에 성곽을 쌓아 방어를 굳건히 하였다.

[전개]

5세기는 고구려가 점차 남쪽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신라 또한 경주평야를 벗어나 활발한 영토 확장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대외적 팽창은 먼저 금강유역에서, 다시 한강유역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금강유역에서의 전쟁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던 전장이었으며, 한강유역은 북쪽으로 급속히 팽창하던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획득한 영토였다. 신라는 두 하천을 통해 교통로 및 경제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어, 향후 삼국통일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청원 남성골산성은 고구려의 남하와 주둔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이다. 5세기 후반에 축조되어 운영된 남성골산성은 금강을 경계로 하여 백제, 신라와 전투를 벌였던 고구려의 최전선 거점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나 남성골산성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을 볼 때 곧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반격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금강유역에서의 삼국항쟁은 계속되었다. 486년 삼년산성을 수축(修築)하여 방어력을 강화한 것은 고구려의 반격을 고려한 것이며, 백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를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494년(소지왕 16) 실죽(實竹) 등이 고구려와 살수지원(薩水之原)에서 싸워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으로 물러나 지켰다는 기록은 5세기 말까지 청주 주변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550년(진흥왕 11) 고구려와 백제도살성(道薩城)금현성(金峴城)의 다툼을 틈타 두 성 모두를 빼앗아 증축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청주와 인근 지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고구려 세력을 한강 이북으로 쫓아내고 한강유역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결과]

신라의 한강유역 획득과 관산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금강 중상류 지역에서 백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이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는 다툼을 계속하게 된다.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백제는 이제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게 되고, 고구려 또한 신라의 북방에 대한 끊임없는 침입을 단행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직면해 신라는 수(隋)·당(唐)과의 연합을 꾀하게 되고 결국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청주와 인근 지역의 확보는 남하하는 고구려나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입장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으로, 청주의 지정학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입장에서는 과거 가야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한강 수계(水系)의 회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거점이었다.

청주지역을 차지한 신라가 축성(築城)을 통해 방어를 공고히 하고, 또 삼국통일 이후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여 옛 백제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청주가 갖는 확고한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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