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청주진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262
한자 新羅-淸州進出
영어음역 Sillaui Cheongju Jinchul
영어의미역 Silla's exploration of Cheongj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강민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연도/일시 6세기 중엽~10세기 초
발생(시작)장소 청주
관련인물 진흥왕(眞興王)|진평왕(眞平王)|김유신(金庾信)|실죽(實竹)

[정의]

6세기 중엽 신라의 청주 진출과 운영.

[개설]

신라는 청주 및 금강 중상류 지역을 장악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역사적 배경]

신라는 5세기 후반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금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6세기 중엽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고구려 세력을 몰아낸 신라는 다시 백제를 압박하여 금강 중상류역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때 청주지역도 신라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판단된다.

[목적]

신라는 청주지역의 확보를 통해 서해안을 통한 중국으로의 지름길과, 백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청주는 금강 중상류 일대의 요충으로 금강을 통해 백제의 수도인 웅진과 사비로 진출할 수 있으며, 진천~안성을 거쳐 서해안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발단]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은 470년(자비마립간 13)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과 474년 문의(文義)의 일모성(一牟城)을 축조한 것에서 비롯된다. 청주 인근까지 진출한 신라의 주력은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을 상실한 백제가 삼년산성과 일모성에서 가까운 웅진(熊津)으로 수도를 옮기는 데에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486년 실죽(實竹)으로 하여금 삼년산성을 수축(修築)하게 한 것은 고구려의 남하를 제지할 수 있는 군사적 거점을 강화하고, 더불어 백제에 대한 대외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를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494년(소지왕 16) 실죽 등이 고구려와 살수지원(薩水之原)에서 싸워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으로 물러나 지켰다는 기록은 5세기 말까지 청주 주변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550년(진흥왕 11) 고구려와 백제도살성(道薩城)·금현성(金峴城) 다툼을 틈타 두 성 모두를 빼앗아 증축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청주지역에 대해 완전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경과]

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된 청원군 문의면 미천리 고분군은 문의지역을 중심으로 신라가 점차 안정적인 영역 지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고구려의 산성으로 밝혀진 청원 남성골 산성이 5세기 후반대에 한정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밝혀진 점이나, 6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청주지역에서 더 이상 백제의 무덤이 만들어지지 못한 점 등은 6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는 청원 지역을 기반으로 청주지역까지 점차 영역을 넓혀 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청주 주변에서 신라계 무덤이 산발적으로 확인되고 백제의 반발 또한 적지 않아 청주를 둘러싼 삼국의 항쟁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

신라는 629년(진평왕 51) 장군 용춘(龍春),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청주 인근에서 고구려 세력을 완전히 패퇴시켜 금강 중상류는 물론 한강 유역 전체의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백제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685년 청주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여 옛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고, 경주를 출발점으로 하는 교통로의 요충으로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 운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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