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082
영어음역 ssireum
영어의미역 Korean wrestling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놀이/놀이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성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작/유래시기 상고시대|삼국시대
노는시기 상시

[정의]

한국 고유의 민속경기.

[명칭유래]

여러 문헌에는 각저(角抵), 각저(角觝), 각력(角力), 각지(角支), 각교(角校), 쟁교(爭交), 각저(殼抵), 상박(相撲) 등으로 불리어져 왔다. 여기에서 각(角)은 ‘서로 겨루다’를 의미하며, 저(抵)는 ‘달려든다’, 저(觝)는 ‘받다’의 뜻으로, 마치 황소들이 맞붙어 힘겨루기를 하듯 ‘서로 달려들어 힘겨루기를 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씨름에 ‘씨'자는 남자의 존칭으로 불리는 ’氏‘자의 대명사이고 ’름‘자는 ’겨름한다‘, ’대결한다‘는 말로써 남자와 남자가 겨룬다는 의미가 있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시루다‘, ’씨룬다‘라는 동사로써 ’시룸‘, ’씨룸‘, ’씨름‘으로 점차 명사화 되었다고 한다.

[연원]

상고 시대에는 씨름에 관한 자료나 문헌이 없다. 다만 씨름에 관한 명칭 중 치우희라는 것이 있는데, 이 치우희는 상고시대 치우천왕의 이름을 딴 것 같다.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에 의하면 치우천왕는 무와 군에 능한 자 이므로 군신과 무예가 씨름의 성격과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 된다.

삼한시대에 씨름에 관한 자료는 중국의 『후한서(後漢書)』와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찾을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를 보면 중국의 한나라 왕은 부여의 왕이 방문했을 때 환영 행사로서 북치고 피리불고 각저희를 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각저희는 오늘날의 씨름과 유사하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인 신소도에서 행하는 제사 예식으로서 여러 가지 기예를 시범하는 종목으로 "씰흠"을 말하고 있다. 이 "씰흠"이 씨름이 아닌가 한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만주 통화성 즙안현 통구 환도에서 우리 나라 씨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역사 자료인 씨름무덤(장천1호분 벽화)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고구려인들은 씨름을 즐겨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신라나 백제에는 씨름에 관한 그림이나 문헌이 없고, 단오나 한가위 등 그 지방의 민속놀이 속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고려시대에는 1330년(충숙왕 17) 3월에 왕이 정사를 신하에게 맡기고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과 씨름을 하였고, 1343년(충혜왕 4)에는 왕이 직접 용사를 이끌고 씨름놀이를 하였을 뿐 아니라 격구와 각저희를 잘 하는 용사에게 포목을 하사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시대적으로 볼 때, 당시 몽고의 침입으로 고통을 당하는 시기였으므로 씨름을 통하여 민족 자주성 회복과 실현의 염원을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왕과 민중이 씨름을 장려하여 행하였던 것은 고려가 고구려의 옛 영화와 영토 회복을 계승하기 위해 건국되었다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419년(세종원년) 6월 15일에 저자도에 행차하여 강변에서 각력희를 보았고, 1560년(명종 15)에는 궁궐 안에서 씨름을 하였다가 사헌부에서 씨름을 금지하는 교지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1664년(현종 5) 5월에는 저자도에서 씨름을 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상대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려 있다. 이 기록들을 볼 때 조선 초기와 중기에는 씨름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송경지(松京誌)』,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의 문헌과 단원 김홍도의 씨름그림, 기산의 풍속도 등에 씨름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단오날과 한가위 때 즐겁게 놀면서 각력희 즉 씨름을 겨루었다하며, 씨름의 방법과 기술의 내용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단원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를 보면 씨름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민중들 사이에서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대에는 소규모의 지역적인 지방 씨름이 성행되다가 1927년 조선씨름협회가 창단되면서 제1회 전조선 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부터 씨름이 현대적인 경기로 태동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다소 쇠퇴를 겪었다. 해방과 더불어 씨름협회도 재건되어 1946년에는 대한씨름협회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83년부터는 씨름경기가 프로화되어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아 졌다.

[변천]

씨름의 종류에는 왼씨름과 오른씨름이 있다. 1931년 이전에는 지방마다 씨름의 방법이 달랐으나, 제2회 전조선씨름대회부터 왼씨름을 전국적인 씨름으로 통일하였다.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씨름은 오른쪽 다리에 샅바를 매고하는 ‘바른씨름’이며, 1959년 제1회 전국장사씨름대회부터 채택되었다.

[기술]

씨름경기의 기술은 상대방을 당기며 들고 옆으로 젖히며 허리를 돌리고 또는 옆으로 채며 넘어뜨리는가 하면 상대방의 다리를 잡아 돌리는 등 한 가지 기술로 시작하여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에는 연속 동작으로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크게 손기술, 다리기술, 허리기술, 종합기술 등의 공격기술과 반격기술, 방어기술 등으로 구분되며, 약 100여 가지 기술이 있다.

손기술은 “①앞무릎 짚기 : 상대의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기며,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뒤로 이동 시키고, 몸체를 오른쪽으로 이동시킨다. 오른 손바닥을 상대의 오른쪽 무릎에 짚는다. 오른쪽 목과 머리로 상대의 몸체를 오른쪽으로 민다. ②앞무릎 치기 : 상대의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기며, 자신의 몸체를 낮게 하고 오른손바닥으로 상대의 오른쪽 무릎을 친다. 어깨로 상대를 밀며, 오른쪽 목과 머리로 상대의 몸체를 오른쪽으로 밀며, 자기의 몸체를 왼쪽으로 이동시킨다. ③뒷무릎 짚기: 상대의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기며, 자기 몸체를 낮게 하고, 오른쪽으로 이동, 오른손바닥을 상대의 왼다리 밖으로 하여 오금을 짚어 당기면서 몸체를 상대 뒤로 민다.” 등 20여 가지의 기술이 있다.

다리기술은 “①안다리 걸어 밀기 :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기며, 상대와의 거리를 가깝게 한다. 오른 다리를 상대의 왼다리 안쪽으로 전진시키며, 오른다리로 상대의 왼다리 오금 아래 부분을 감는다. 오른다리를 뒤로 당기며 오른쪽 어깨로 상대의 몸체를 뒤로 민다. ②덧걸이 :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기며 자기의 몸체를 낮게 하고, 몸체를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오른다리를 상대의 왼다리 밖으로 감으며, 자기의 오른다리를 뒤로 당기고, 목을 상대의 왼쪽 어깨에 밀착시킨다. ③밭다리 걸기 :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기며, 자기의 몸체를 왼쪽으로 이동시킨다. 자기의 왼쪽다리를 앞으로 이동시키며, 오른다리를 상대의 오른다리 밖으로 하여 걸어 민다.” 등 20여 가지의 기술이 있다.

허리기술은 “①곧은 배지기 :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겨 상대를 들어올리며, 자기의 오른쪽 무릎으로 상대의 오른쪽 무릎을 왼쪽으로 밀어나간다. 자기의 몸체를 오른쪽으로 하여 뒤로 회전한다. ②오른 배지기 :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겨 상대를 들어올리며, 오른다리를 상대의 왼다리 안쪽으로 전진시킨다. 상대의 몸체를 자기의 오른쪽으로 들며, 몸체를 왼쪽으로 하여, 뒤로 회전시킨다. 왼다리를 뒤로 이동시킨다. ③엉덩이 배지기 : 허리와 다리샅바를 당기며, 몸체를 오른쪽으로 이동시킨다. 자기의 둔부를 상대의 복부하단에 밀착시키며, 자기의 둔부를 상대의 오른다리 안쪽을 치면서 자기의 몸체는 오른쪽으로 하여 뒤로 회전시킨다.” 등 20여 가지의 기술이 있다.

종합기술은 “①우로뒤집기 : 자기의 몸체를 작게 하고, 머리를 상대의 복부에 들어가게 해서, 오른팔을 상대의 왼팔 밖으로 하여 감아 낀다. 자기의 오른다리 무릎을 굽힌다. 머리를 상대의 왼쪽 겨드랑이로 전진시키며, 자기의 몸체를 세우며 뒤로 굽힌다. ②공중 돌리기 : 오른다리를 뒤로 힘 있게 빼며, 상대의 손을 다리샅바로부터 떨어지게 한다. 왼손으로 상대의 다리샅바를 힘껏 잡아당기며, 상대를 공중에 띄우고, 한바퀴 돌려 머리나 어깨부터 땅에 떨어지게 한다.” 등 20여 가지의 기술이 있다.

[경기방법]

씨름의 경기는 “①선수를 입장시킨다. ②본부석을 향하여 인사를 한다. ③선수 간에 인사를 한다. ④선수는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⑤샅바를 잡는다. ⑥왼쪽 무릎을 세운 후 일어선다. ⑦준비자세를 시킨다. ⑧경기시작 신호를 알린다. ⑨한판의 승부가 끝난 후에는 주심의 허락 없이 경기장을 이탈 할 수는 없다. ⑩경기가 끝나면 신호(호각)를 길게 분다.” 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경기장은 지름 8m의 원형으로, 실외 경기장의 모래장 높이는 70㎝~30㎝ 이상이다. 보조 경기장은 2m 이상 넓어야 하고, 모래장의 높이는 10~20㎝ 이내이다.

승패는 주심 1명, 부심 2명으로 구성하며, 경기의 승부 판정을 관장한다. 주심은 경기장 내외에서 경기진행과 승부의 판정을 선언한다. 부심은 주심을 보좌하여 경기진행을 도우며, 경기장 밖의 좌우에 위치한다.

체급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및 일반으로 구분되어 각각 7체급으로 나누고 있다. 시도 대항전, 직장 대항전, 도시 대항전, 각급 학교대항전, 군경 및 예비군 대항전 등의 단체전은 정선수 7명과 후보선수 7명으로 이루어진다. 전국장사씨름대회는 대표적인 개인전이며, 각 체급별로 정선수 1명과 후보선수 1명을 둘 수 있다.

씨름의 승부는 3판 2선승제로 결정된다(단, 민속씨름은 결승전에서만 5판 3승제를 실시한다). 다만 대회본부의 사정으로 단판제를 실시할 수도 있으나, 가급적 피하고 있다. 경기의 제한시간은 1승부 2분인데, 2분 이내에 승부가 나지 않을 때에는 1분간을 휴식 하고 2분간의 연장전으로 승부를 결정하게 된다. 연장전을 할 때에는 한판 승부로 결정하되, 승부가 나지 않을 때에는 몸무게가 가벼운 선수를 승자로 결정하며, 체중이 같을 경우에는 추첨으로 결정한다.

[현황]

청주지역의 씨름은 운호고등학교가 1969년 3월 당시 체육교사였던 한경갑, 이해찬의 지도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969년 6월 20일 제4회 충북학교 체육대회에서 운호고등학교 씨름부가 2위의 성적을 거둔 것을 기점으로 해마다 충북대회 뿐만 아니라 전국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2003년도 입상현황을 살펴보면 제17회 전국시도대항 장사씨름대회에서 1학년 최영웅이 3위, 제5회 증평인삼배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고등부단체 3위에 입상하였다.

2004년 제18회 전국시도대항 장사씨름대회와 제8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2학년 최영웅이 1위에 입상하였고, 제33회 충청북도교육감기 씨름대회에서 2학년 노병훈, 최영웅이 소장급 역사급 1위로 입상하였다.

이와 함께, 2000년 3월 민속씨름의 저변확대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의 우수선수를 육성하고 시민체육회를 통하여 순수 아마추어 선수발굴 및 생활체육 활성화를 위하여 청주시 씨름협회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청주시 씨름협회는 창립 후 씨름왕 선발대회 및 도지사기씨름대회에서 우승 4회와 준우승 1회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도민체육대회에서 3위로 2번이나 입상하였고 2005년 전국체육대회에서는 충북이 종합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씨름은 대한민국 고유의 민속경기로, 민족경기의 혼이 깃든 전통의 국기로써 의의를 지닌다. 왜냐 하면 씨름에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식체계(원형 씨름장은 우주를, 샅바를 맨 두 사람은 음양의 조화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씨름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장려되었고, 왕과 민중에게 널리 행해짐으로써 국난극복과 국민전체를 위한 가장 보편적이고 한국적인 문화유산으로써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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