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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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尾-象徵金烏山 |
영어의미역 | Geumosan Mountain, Geographical Symbol of Gumi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삼문 |
[개설]
금오산은 최근 많은 등산객이 찾는 탓에 잘 알려진 산이 되었다. 외지에 나가서 구미에서 왔다고 하면 으레 ‘금오산을 올랐노라’는 말을 듣게 된다. 구미 사람들은 외지 방문에서 돌아올 때면 멀리서 나타나는 금오산을 보고서 ‘구미에 다 왔구나’ 하는 표지로 삼고 있다.
한반도의 진산(鎭山)은 백두산이다. 백두산에서 태백산이 이루어졌고, 다시 소백산이 되고, 소백산은 죽령과 새재 그리고 추풍령을 지나 무주의 덕유산을 만들어 남으로 힘차게 내치다가 한 지맥이 동북으로 거슬러 김천 대덕의 수도산이 되더니, 여기서 세 갈래로 나뉘어져 한 줄기는 동남으로 내치어 합천의 가야산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북으로 뻗어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경계점에 솟아 삼도봉이 되고, 나머지 한 줄기는 북으로 내치다가 땅속으로 스미듯이 간직했던 기백이 김천, 칠곡, 구미의 경계점에서 우뚝 솟구쳐 976m의 금오산이 되었다.
금오산은 서쪽으로는 김천의 남면, 동남으로는 칠곡의 북삼을 경계로 하며 면적이 무려 37.9㎢나 된다. 산세가 수려하고 준기(俊奇)하여 하늘처럼 높게 솟아 사면이 가파르며, 또한 태벽(苔壁)이라 여름에는 한기가 차고 가을에는 단풍의 명소로 유명하여 일명 소금강이라 불리며, 예로부터 영남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금오산의 유래]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다. 고려 때는 산세의 아름다움이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겨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으며, 황해도 해주의 북숭산(北崇山)과 더불어 2대 명산으로 꼽혔다. 금오산의 명칭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당나라 국사가 빛을 내는 새를 따라 왔더니 이 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이후로 까마귀가 빛을 띠며 날아왔다고 하여 금오산이 되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금오(金烏)는 옛날부터 해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상상의 새 삼족조(三足鳥)로, 태양 자체 또는 해의 정기를 뜻하는 동물이었다. 달에 산다는 옥토끼가 달의 서기며 달 자체를 뜻하는 것과 같다. 이외에도 옛날에 천지가 개벽하여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산이 거미만큼 남았다고 해서 금오산이 되었다거나, 천지개벽 때 전부 바다가 되었는데 산봉우리가 까마귀 머리만큼 남아서 금오산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금오산 능선을 유심히 보면 ‘왕(王)’ 자처럼 생긴 것도 같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거인산(巨人山)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도 한다. 거인의 옆모습에서 그 눈(현월봉과 약사봉 사이)이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어서 일찍이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명산이로고! 거인이 나겠구먼.”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그 산자락을 드리운 곳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선산 방면에서 보면 상봉이 붓끝 같아 필봉(筆峰)이라 하며 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인동 방면에서 보면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귀봉(貴峰)이라 하며 고관이 많이 배출되었다. 개령 방면에서 보면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노려보는 모습 같다 해서 적봉(賊峰)이라 하며 또는 큰 도적이 많이 나왔다고 엉뚱하게 풀이되기도 하고, 김천 방면에서 보면 노적가리 같다 해서 노적봉(露積峰)이라 하며 부잣집이 많았다 한다. 그리고 성주 방면에서 보면 바람난 여인의 산발한 모습 같다 해서 음봉(淫峰)이라고 하며 관비가 많이 났고, 성주 기생이 이름이 난 것도 이 산세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숭산(嵩山)이라 불리던 산]
해평면 해평리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최현이 편찬한 사찬 읍지인 『일선지(一善志)』에는 금오산에 관해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고려 때는 남숭산(南嵩山)이라 일컬어 해주의 북숭산과 짝하였다. (선산)부의 남쪽 43리에 있다. 산 모양이 준절, 기이하며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다. 고려가 망하려 하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이 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산의 서쪽은 개령 땅이고, 동쪽은 인동, 남쪽은 성주, 북쪽은 (선산)부의 지경이다.”
이어서 정상인 달이 걸린 봉우리를 뜻하는 현월봉, 금오산 마애보살입상이 자리한 보봉, 그리고 폭포에 대한 각주가 달려 있다. 이를 통해 현월봉·보봉이란 금오산의 봉우리 이름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통상 ‘숭’자는 ‘숭(崇)’을 많이 쓰나 금오산의 경우에는 ‘숭(嵩)’을 쓴다. 자전을 찾아보니 ‘숭산(嵩山)’은 고유명사로 중국의 오악 중에서 가운데 위치한 중악인 숭산을 말한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 또는 소림 무술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그 숭산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칠곡군 북삼면에 속한 금오산의 남쪽 자락에는 ‘숭산’이란 마을이 있으며, 소림사라는 이름으로 옛 절터에 중창된 절도 있다.
[금오산의 경관]
금오산을 아는 많은 사람들, 금오산을 찾고 오르는 많은 사람들은 금오산의 앞면만 본다. 금오산의 서편 자락인 수점마을이나 갈항마을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아는 이들이 드물다. 지금은 이름을 잊었지만 돼지들이 줄을 이어 산을 오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금오산록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장쾌한 맛이 있다. 또한 겨울 철새들이 날아오르는 오봉저수지 또한 금오산의 빼어난 경관에 한 몫을 보탠다.
[불교문화 유적]
이두문이 적혀 있는 유일한 탑인 갈항사 동탑과 서탑은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으로 실려 가서 이전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다. 보봉 아래에는 일출을 정면으로 받는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이, 숭산마을 위에 자리 잡은 고찰 선봉사에는 보물인 선봉사 대각국사비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정상 아래의 천년 고찰 약사암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지리산에서 모셔 온 부처님으로 직지사와 수도암에 모셔진 부처님과 한 자리에 있었던 ‘형제불(兄弟佛)’이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대혈사지, 갈항사지, 동양사지, 보봉사지 등 금오산록의 20여 개소의 절터가 번성했던 불교문화의 유허로 남아 있다.
[유교문화 유적과 산성]
『일선지』에는 고려 충신 길재가 금오산에 머물었다고 했다. 단언하면, 금오산이 절경이어서 길재가 머물렀고 길재가 머물러서 금오산이 유명해지기도 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조선조의 수많은 학자와 시인 묵객이 금오산 인근에서 길재를 기리는 시를 지었다. 심지어 금오산 근처에 오지도 않고 ‘오산(烏山, 금오산) 낙수(洛水, 낙동강) 운운(云云)’하며 지은 시도 있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 금오산 입구에 자리 잡은 채미정이다. 길재를 향사하는 금오서원은 원래는 금오산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난 후 선산읍 원리로 옮긴 후 채미정을 지어 길재의 유허를 기리는 곳이 된 것 같다. 길재가 개성에서 내려와서 금오산의 대혈사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위치를 알기는 어렵다. 아마도 채미정과 폭포 사이의 어디일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금오산에도 산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TV 사극을 통해 산성이 있으면 적군과 전투를 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 산성은 거의 없다. 맨 몸으로도 오르기 쉽지 않은 산에 위치한 산성을 공격하는 어리석은 장수는 없기 때문이다. 금오산성은 인동의 천생산성과 함께 낙동강 길목을 조망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병참 기지로서의 기능이 뛰어나다. 금오산 서편 자락 수점마을과 갈항마을 사이에 우장마을이 있다. ‘쇠바탱이’라고 부르는 우장마을에서는 소를 데리고 금오산 내성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성안에 살던 사람들]
조선 후기 선산 사람 김하정의 「유금오산록(遊金烏山錄)」이 그의 문집 『삼매당집(三梅堂集)』에 전해진다. 김하정은 금오산 정상부의 사찰에서 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금오산 내성에는 유사시 승병과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산성을 고칠 때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산성에서의 민간인들의 삶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으나, 가장 최근까지 성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1970년대 독가촌 철거령으로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많을 때는 10여 호, 적을 때는 7~8호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들이 산성에서 생산한 배추가 시내에서 팔렸고, 더러는 감자 술을 제조하여 방문객에게 팔아 ‘금오산 감자술’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들은 산중인 내성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고, 산자락에는 여느 농촌과 같이 주민들의 수는 줄었지만 아직도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마을들이 수점마을, 갈항마을, 숭산마을이다. 금오산록의 이들 마을에 있는 옛집들이 금오산록에서의 삶의 흔적을 어느 정도 전해 주고 있다.
[신화와 전설의 산]
금오산에는 여러 가지 신화와 전설이 전해 온다. 신라 때의 도선국사 또는 조선 초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무학대사가 금오산 아래를 지나다가 ‘임금이 날 산’을 예언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주천자(朱天子)’가 금오산 아래에 살다가 중국에 가서 황제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중국 명 태조 주원장이 조선 사람이라는 전설은 다른 지역에서도 간혹 발견되는 전설이다. 이것의 사실 유무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이니까. 다만 금오산을 두고 큰 인물이 난다는 숱한 이야기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만 이해하면 될 것이다.
“금오산은 우리가 알기로 옛날에는 대본산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왜 금오산으로 변했느냐 하면 당나라 때 국사가 빛을 내는 새가 있어 따라와 보니 이 금오산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이후로 금오로 불렀다 캐요.”(1994. 1. 22. 유영칠, 남, 64)
구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또 금오산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모두가 아는 이야기가 있다. “금오산 아래이되 금오산이 보이지 않고(烏山之下 不見烏山), 낙동강가이나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곳(洛江之邊 不見洛水), 그곳이 천하의 명기(명당)이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
[사라진 마을, 성안마을]
오늘 찾아보는 마을은 금오산 정상 아래 내성(內城) 안에 자리 잡았던 성안마을이다. 짧게 잡아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던 성안마을이 사라진 것은 1970년대이다. 당시 내무부는 화전민 정리사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수많은 산골과 섬에서 독가촌들이 철거되었다. 해발 800m의 산 속의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마을이 사라졌다. 1789년(정조 13)의 기록에는 금오산의 원호(元戶)가 180호이고 451명이 살았다고 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나온 『청구도』에는 내성 안 마을에 40호가 거주한다고 하였다.
1970년대까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내성 분지만을 성안이라 하지 않고 외성 안까지 포함하여 성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광복을 전후하여 10여 호가 살았고 전쟁을 거치면서 주둔한 미 공군 통신대와 국군이 다시 한 번 성안마을에 활기를 가져왔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통신대와 관련된 일을 하던 임시 고용인들이거나 출퇴근자였기 때문에 군대가 철수하면서 함께 산에서 내려왔다.
[성안마을의 감자술]
성안마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벼농사도 시도해 보았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 오직 밭농사에만 의존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고랭지 채소라 할 수 있는 성안마을의 배추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밭작물의 소출을 지게에 지고 내려와 쌀과 바꾸기도 하고, 약초를 캐서는 약목, 대구 등지로 내다 팔기도 하였다. 부족한 쌀을 대신하여 감자를 함께 넣어서 막걸리를 빚었다. 이것이 성안 감자술이다. 강원도 평창 등지의 감자술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성안 감자술을 맛 본 이들은 그 풍미를 매우 칭찬하는데, 해발 800m에서 먹는 술이 맛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그 추억을 못 잊어 무형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기도 하였다.
[외로운 금오산성 중수송공비]
지금 성안에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 만이 성안 분지를 지키고 있다. 대원군의 섭정 때에 세운 이 비문에 따르면 누각만 해도 100여 칸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 많던 건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이전부터 금오산의 정상부와 내성 분지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진남사란 절을 비롯하여, 군량미와 군기를 보관한 창고, 성문루, 장대 등 군사 시설과 사찰 시설들이 있었다. 채 100년이 못 된 세월에 쓰러지고 뜯겨 나가고 그 유지만 겨우 흔적을 남기고 있다.
[소가 오르내리는 길]
마을 사람들이 장을 보거나 산 아래와 연결되는 길은 지금과 같이 남통동으로 통하는 길과 지경리(김천 남면)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경작을 위해 이용되는 소는 이 가파른 두 길로는 다니지 못한다. 금오산 서쪽 자락에는 수점마을이 있다. 수점마을의 남쪽에는 그 유명한 갈항사지가 있는 갈항마을이 있다. 그 중간에 우장마을이 있다. 금오산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우장을 ‘쇠바탱이’라고 불렀다.
이 쇠바탱이에서 금오산을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다. 소가 걸어서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밭을 갈기 위해 빌린 소를 끌고 성안마을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길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금오산성 수축을 위한 군수 물자를 날랐을 것이다. 전시에 병참 기지였던 금오산성에는 많은 군수 물자가 비축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고지도를 보면 금오산성 내에 숱한 창고들이 그려져 있다. 쇠바탱이-성안마을은 수송의 주요 루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 상상한다. TV 드라마 「여로」가 유행하던 시절, 부상마을(김천 남면)과 인근 주민들이 금오산 정상의 통신대에 있는 TV를 보기 위해 드나들었던 길도 이 길이라고 한다.
[금오산 자락의 마을들]
문화권은 행정구역으로 가를 수 없다. 금오산은 구미시, 김천시, 칠곡군 3개 시군에 걸쳐 있다. 따라서 각 자치단체는 자신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지역에만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행정구역의 구분과 같이 나누어지지 않는다. 금오산 자락의 여러 마을들은 각기 독자적인 마을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평야지대의 마을들과는 사뭇 다른 금오산 문화권의 모습을 공통으로 지니기도 하였다. 금오산이 품은 마을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봐도 남통·덤바우·수점(구미시), 갈항·우장·부상·지경(김천시), 숭산·강진(칠곡군) 등이다. 이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지난 세월 금오산의 그늘에서 금오산과 밀접한 삶을 살았다. 남통은 금오산 집단시설 지구의 건립으로 대부분의 민가들이 철거되고 집단시설지구 또는 시내로 이주하여 옛 모습을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법성사골에 남은 한 두 가옥을 통해 예전 모습을 더듬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산자락에 드문드문 집 자리를 마련하고 경사지에 밭을 장만하여 산에 기대어 산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다.
[서울로 간 갈항사 탑]
갈항사는 꽤 유명한 절이다. 지금의 궁색한 갈항사는 폐허가 되었던 옛 갈항사 인근에 새로이 조성된 절이다. 원래의 갈항사는 서울로 간 동탑, 서탑의 위상과 석조석가여래좌상으로 유명하다. 갈항사를 따로 보면 그냥 꽤 큰 절이 폐허가 되었구나 하지만, 금오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18개의 절터와 관련시켜 보면 금오산 서쪽을 관장하는 절로서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그 반대편인 금오산 동쪽 자락에는 옥림사지가 있고, 북쪽에는 대혈사지, 남쪽에는 선봉사지가 있어 사방에 금오산을 호위하는 사찰이 있었다고 감히 상상해 본다.
갈항마을의 아름다움이 갈항사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갈항마을은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아름다운 금오산의 모습을 조망할 수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고속전철 건설 공사로 마을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있으나, 동구에 자리 잡은 온전한 모습의 조산무지(돌무더기탑), 산골 민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토담집들, 자동차 도로가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던 1990년대 초중반의 갈항마을은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 산골의 서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고개 마루의 서낭당....
갈항마을을 포함한 행정동인 오봉동에는 겨울 철새가 날아드는 오봉저수지, 그 곁의 금오초등학교 분교 등 연인들의 발길을 끄는 곳이 더러 있어 최근 드라이브족의 모습을 간혹 볼 수가 있다. 갈항마을에서 걸어 보지 못한 길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부상으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금오산의 이름을 간직한 숭산마을]
숭산(嵩山)! 원래 금오산을 남숭산이라 불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은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의 일부로 포함된 숭산마을은 김천시 아포읍의 숭산마을과 함께 금오산의 옛 이름을 간직한 같은 이름의 2개 마을이다. 숭산마을은 대각국사의 비석이 발견되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아포의 숭산마을은 금오산 자락은 아니지만 주천자 탄생 설화를 간직한 마을이다. 중국의 천자가 한국 땅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허황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주천자 탄생담은 한국의 여러 곳에서 전승되고 있다. 인물이 많이 난다는 금오산 명기설(名基說)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총을 맞은 대각국사비]
선봉사가 폐허가 되어 대각국사비는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었다. 숭산마을의 어느 주민이 현몽하여 대각국사비를 찾았다고 한다. 그 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비석에는 총탄 자국이 남게 되었다. 수백 년 땅 속에 묻혔다가 빛을 본 뒤 얼마 만에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는가. 또 알 수 없는 일은 천태종 시조의 유적이 있는 곳인데도 천태종단에서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전에 만난 선봉사 주지는 천태종 성지의 모습을 갖추는 불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일제가 베어간 당산목]
수점마을 하당(下堂)과 갈항마을 하당이 신목(神木)과 조산무지로 이루어졌듯이 숭산마을 입구에 있는 하당도 돌무더기의 흔적과 나무가 있다. 원래 길 양쪽에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가 있었는데 이제는 작은 나무 한 그루만 길목을 지키고 있다. 그 연유를 들어보니,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본군들이 배를 만드는 재료로 쓰기위해 나무 한 그루를 베어 갔다. 서슬 퍼런 왜놈들 등쌀에 다들 숨죽여 살던 시절이었지만 주민들은 칠곡군청으로 달려가 거세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잊혀져가는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가 없으나 민중의 믿음 체계로 자리 잡았던 이른바 민중신앙은 특히 근현대에 갖가지 이유로 훼손되고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감나무가 흔한 숭산계곡의 초겨울 아침 풍경은 안개가 서려 신비감과 아름다움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