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6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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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영어의미역 | Tumulu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박보현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삼국시대의 무덤.
[개설]
막연히 고분(古墳)이라고 하면 오래된 무덤을 일컫는 것으로 여겨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전문적 입장에서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을 일컬어서 고분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서도 봉토가 높고 내부에 금·은·금동으로 만들어진 금속 공예품과 같은 화려한 껴묻꺼리[副葬品]를 가진 무덤을 특별히 고총고분(高塚古墳)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런 고총고분의 존재는 삼국시대와 원삼국시대를 갈라놓는 기본적 차이다. 나아가서 무덤을 만드는 데에 들어가는 노동력, 시간, 그리고 금·은과 같은 고급품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의 확보와 장인의 구성 등을 고려하여 고총고분의 출현을 왕국의 출현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무덤들은 국가와 지역에 따라 토기나 치레꺼리[裝身具]와 같은 유물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라 고분, 가야 고분, 고구려 고분, 백제 고분으로 나누고 있다. 구미 지역 고분의 출토 유물 가운데 굽다리접시[高杯], 긴목항아리[長頸壺], 출자형 입식을 단 금동관[出字形金銅冠] 등을 경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세부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외형적 큰 틀에서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구미 지역 고분은 신라 고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변천]
구미 지역에는 낙동강과 낙동강의 작은 지류를 따라 형성된 구릉지대에 무덤들이 떼를 지어 분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선산 낙산리 고분군과 구미 황상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 지역 사회에서 활동하다가 묻힌 인물들이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이동해 온 인물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지역에서 고분을 남길 정도의 인물이라면 지역에 상주하였던 토착 세력일 것으로 본다.
고분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토착 세력이 존재하였던 것은, 5세기 후반부터 신라의 역역(力役)에 일선민(一善民)들이 동원되거나 왕의 순행(巡幸) 때에 위무(慰撫)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토착민들이 그 이전 단계부터 상주하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다만 이러한 구미 지역의 토착인들이 구미적 또는 토착적 속성에서 경주적 또는 신라적 성격으로 어떻게, 왜 변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지금까지 구미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고분은 신림리·낙산리·월곡리·황상동 등지의 고분인데, 무덤의 내부 구조는 목곽묘·석곽묘·유사적석목곽묘·석실묘 등으로 확인되었다. 무덤의 내부 구조는 보수성을 매우 강하게 가지는 것으로 인식되는데, 경주 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적석목곽묘와 유사한 것이 신림리 고분군에서 2기 확인되었다. 낙산리 고분 제22호에서는 횡구식 석실(橫口式 石室: 관이나 시신을 무덤의 한 쪽 벽면을 이용하여 넣는 매장 방식)의 봉토 밖에 유물을 방형 토광에 부장한 일종의 제사 유구를 가진 장법도 확인되었다.
아울러 부장된 유물은 토기·철기·장신구 등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경주의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것과 거의 유사한 형식의 굽다리접시[高杯]·긴목항아리[長頸壺]·파수배·적색연질 발(鉢) 등의 토기류를 바탕으로 하여 말갖춤새[馬具類] 등이 부장되어 있어서, 앞에서 설명한 무덤의 내부 구조와 부장 유물을 서로 관련지어 보면 신라화한 사람들의 무덤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이처럼 무덤을 바탕으로 볼 때 신라 고분이 형성되는 것은 5세기대에 들어와서 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바로 직전 단계인 4세기의 문화적 특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신라적 무덤이 만들어지기 전의 특징은, 구미 황상동 3호분의 봉토에서 수습한 통형 고배, 해평 낙산리 택지조성지역Ⅱ·Ⅲ 구간 고분에서 출토된 목짧은단지[短頸壺]·목이 있는 항아리잔[頸杯]·주발형그릇받침[鉢形器臺] 등을 통해 볼 때, 대략 4세 말 5세기 초까지는 경남 지방과 경주 지방에서 확인되는 이른바 ‘고식도질토기’로 불리는 공통 양식의 문화적 속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미 지역의 작은 물길을 따라 분포하고 있는 여러 고분군들은 해당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였던 토착인의 무덤임은 분명하지만, 발굴 조사가 모두 이루어지지는 않은 단계여서 집단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을 교류 모습에 대해서는 언급하기가 어렵다. 다만 일부 토기에서 재지계(在地系)에서 경주화되어 가는 모습은 관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