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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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鳶-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지영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서 바람을 이용하여 연을 하늘에 띄우며 즐기는 놀이.
[개설]
연날리기 는 종이에 가는 대나무 가지를 붙여 연을 만들고, 얼레에 감은 실을 연결한 후에 하늘에 날리며 노는 민속놀이이다. 연날리기는 정초에서 정월 대보름까지 그해의 재난을 멀리 보낸다는 뜻에서 연을 띄우며 즐기는 전래 놀이의 하나로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특히 매해 새해를 전후한 겨울 각처에서 성행하여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는 “액(厄)연을 띄운다.”고 하여, 연의 중간에 ‘액(厄)’, ‘송액(送厄)’,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얼레의 실을 죄다 풀고 멀리 날려 보내기도 했다.
[연원]
연날리기 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연을 만들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열전(列傳)」, 김유신조(金庾信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군사적 목적으로 때때로 연을 날리던 것이 점차 세시 풍속과 결합되어, 또 오락으로 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 33권 충선왕조(忠宣王條)에는 어떤 궁노(宮奴)가 동네 아이들의 연을 빼앗아 충선왕에게 바쳤더니 왕이 책망하면서 곧 돌려주라고 명령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놀이 도구 및 장소]
종이에 가는 대나무를 붙여 만든 연이 필요하다. 한국의 연은 방패연, 가오리연 등 형태와 문양에 따라 100여 종으로 나뉠 만큼 다양하다. 놀이 장소로는 연실을 한없이 풀기 위해 장애물이 없는 곳이 적당하다. 예전에는 서울의 청계천 변 등이 선호되었고, 시골에서는 개울가 혹은 동산 위에서 많이 날렸다고 한다.
[놀이 방법]
1993년 서울특별시에서 간행한 『서울 민속 대관』의 「놀이의 실상 일람」에서 도봉구 번 2동에 5대째 거주하는 주민 윤수환[남, 66]은 연날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예전에 연은 주로 방패연이었는데, 갈퀴[검불이나 곡식 따위를 긁어모으는 데 쓰는 기구] 망가진 대나무를 사용했다. 이 갈퀴를 다듬고 깎아서 창호지를 붙여 만들었다. 그리고 연 위에 1전짜리 동전을 5개 놓고, 그 위에 먹칠을 하면 동전을 놓은 5군데만 하얗게 남게 된다. 정월 보름까지 연을 날리고, 그 후에는 날리지 않았다. 보름날에는 일부러 연줄을 끊어 연을 날려 보냈다. 연싸움을 할 때는 이기기 위해 개미[겜치]를 먹인다. 사기를 빻아서 밥에 넣어 짓이긴 다음 실에 묻히고 밖에 두어 얼리는 것이다. 이 개미 먹인 실은 매우 날카로워서, 얼레에 감았다 도로 풀어줄 때 손을 대면 그대로 베게 되어 조심해야 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정철(鄭澈)[1536~1593]의 시조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에서는 “내 집의 모든 액(厄)을 너 홀로 가져다가, 인가(人家)에 전치 말고 야수(野樹)에 걸렸다가, 비 오고 바람 불 때 자연 소멸(自然消滅) 하거라.”는 내용으로 ‘액막이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액막이연이 집에 떨어지면 재앙이 든다는 속신을 믿었다. 그러나 새해의 연날리기는 겨울 내 웅크렸던 아이들이 활달한 활동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더 있었다.
[현황]
현재 연날리기는 액을 막는다는 제의적 측면이 아니라, 축제에서 행해지는 대동 놀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2013년 2월 22일 도봉구는 구청 광장, 방학천, 중랑천 변에서 ‘도봉 구민과 함께 하는 정월 대보름 큰 잔치’를 열어 제기차기, 투호 놀이, 팽이치기, 널뛰기, 윷놀이 등 여러 민속놀이를 벌임은 물론 연 만들기와 함께 만들어 동시에 연날리기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