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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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津里堂祭 |
영어공식명칭 | Hanjin-ri Dangje |
이칭/별칭 | 한진 풍어제,한진 풍어 당굿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대영 |
의례 장소 | 한진 1리 마을 회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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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전통 의례 |
의례 시기/일시 | 음력 정월 첫 진일(辰日) |
신당/신체 | 용신[당할머니]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에서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여 지내는 새해맞이 제의.
[개설]
한진리 당제는 안섬 당제, 성구미 당제와 더불어 당진 서해안 해양 문화를 상징하는 새해맞이 의례이자 마을의 축제이다. 해마다 음력 정월 첫 진일(辰日)에 당산에 올라가 제를 모시고 이튿날 하산해 배고사를 지내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당제는 마을 최고 조직인 대동계에서 주관했으나 오늘날에는 대동계가 해체되어, 어촌계에서 주도하고 있으며, 마을의 이장을 비롯한 제반 조직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당제의 축원과 당굿을 담당하는 법사는 외부에서 초빙한다. 마을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마을 뒤편 당산에 당집이 있으며, 바로 옆에 300여 년 정도의 수령을 가진 신목인 산제 소나무가 있다. 당집 주변은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하여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으며, 특히 여성은 부정한 존재로 여겨 출입을 금지했다.
[연원 및 변천]
한진리 당제가 시작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이 형성된 이후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하며, 신목의 수령을 볼 때 300여 년 정도의 역사를 추청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당집의 상량에 1921년[단기 4254년]으로 쓰여 있어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과거 한진이 나루터로 큰 역할을 했을 때는 하나의 지역 축제로서 당제가 큰 규모로 행해졌으나 오늘날에는 나루터의 기능이 폐지되면서 당제 또한 쇠퇴했다. 또 하나의 계기는 문화재 지정과 관련된 것이다. 인근 지역 안섬 당제의 경우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나 한진의 경우 당시 논의를 통해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함에 따라 어촌계의 일부 주민들의 주도로 겨우 전승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마을에서 소를 잡아 제물로 바쳤으나 오늘날에는 쇠머리만 구입하여 간략하게 제물을 바친다.
[신당/신체의 형태]
한진리 당제의 주신은 용신이다. 주민들은 '진대서낭', '당할머니', '임경업 장군' 등으로 부르는데, 인근의 안섬을 당할아버지, 한진은 큰부인, 성구미는 작은부인이라 하여 부부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임경업 장군의 경우는 조기잡이를 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절차]
당제를 위한 준비 회의인 음력 12월 대동 회의에서 제사 날짜와 당주, 당화장 2~3명을 선출한다. 또 당제에 필요한 비용을 산출하고 집집마다 추렴할 금액을 책정한다. 오늘날에는 어촌계원과 선박을 보유한 어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당주로 선정되면 부정한 것을 삼가야 한다. 특히 돼지고기를 멀리하는데, 이는 당신인 용[뱀]이 돼지와 상극이기 때문이다. 제물은 당주 집에서 준비하는데, 과거에는 다양한 제물과 함께 소를 잡았으나 오늘날에는 쇠머리로 간략히 준비한다.
당제를 올리는 날 아침, 마을 풍물패들은 당기(堂旗)를 앞세우고 당산에 올라 당집 앞에 기를 세운다. 오후가 되면 풍물을 치다 당에 오른다. 당주와 법사가 앞장서고 선주들은 자신의 뱃기를 들고 행진한다. 뱃기는 어선의 규모가 크거나 당 추렴을 많이 낸 선주가 앞장선다. 당에 오를 때는 길군악과 함께 배치기 소리가 함께한다. 당제는 저녁 밀물이 밀려오는 시간에 시작되어 자정 무렵까지 계속된다. 제물을 차리고 신목 소나무 앞에서 간단한 산신제를 지낸다. 법사는 좌정하여 독경을 하며 축원한다. 그 뒤 당주가 당할머니와 장군당, 각시당에 재배하면, 이장과 선주들이 차례로 재배한다. 다시 마을의 안녕과 번영, 선주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법사의 축원이 이어지고 대동 소지를 시작으로 뱃기 순서에 따라 선주들의 소지, 마지막으로 개인 소지를 올린다.
다음 날 당 앞에 집결해 법사의 길지와 뱃기를 매달고 해안가로 내려오면 당주의 신호에 따라 자신의 배에 뱃기를 꽂는데, 가장 먼저 꽂은 사람이 고기를 많이 잡는다 하여 서로 경쟁하여 뛰어가 뱃기를 꽂는다. 이후 당제에 썼던 음식인 '고사채'를 가지고 배고사를 지낸다. 이는 뱃길의 안전과 만선을 축원하는 것이다. 이후 잡귀를 달래는 거리제를 지내고 풍물패와 함께 마을을 돌며 지신밟기를 한다.
[축문]
당제의 경우 별도의 축문 없이 소지와 독경으로 이루어진다.
[부대 행사]
1950~1960년대만 해도 당제와 함께 외부에서 남사당을 비롯한 예인들이 들어와서 기예를 선보이고, 구경꾼이 운집해 하나의 지역 축제의 역할을 했다. 또한 당제 과정에서 거리제와 지신밟기를 하면서 마을의 안녕을 함께 기원했다. 한진리 당제는 속신에 안섬 당제와 성구미 당제와 부부 관계라 전하는데, 안섬이 남편, 한진이 큰부인, 성구미가 작은부인이라 전해진다. 이는 풍어제, 당굿 형태의 당제라는 내포 지역 어촌 마을의 보편성과 함께 지역의 특수성을 담은 부분이다. 이러한 당제는 마을 구성원의 의무적인 참여로 성립되며,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이웃과 화합을 도모하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울러 제사 과정에서 배치기 소리, 길군악 등 풍물놀이, 남사당의 공연 등 지역의 축제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현황]
한진은 당진의 가장 큰 어항이자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과거 조기를 잡으러 가는 어업의 중심지였고, 당진과 평택, 인천 등과 왕래하는 여객선이 운행하던 곳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오일장을 비롯하여, 풍요로운 어촌 마을의 삶을 영위한 곳이다. 하지만 1979년 삽교천 방조제의 완공으로 나루터의 기능이 무의미해져 1980년대 초반 폐지되었다. 이후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한보 철강, 고대 공단, 부곡 공단 등 인근 지역의 산업 단지 이전과 수도권에서 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숙박, 요식업 등으로 다시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한진리 당제는 어항의 기능이 위축된 탓에 오늘날 전승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던 전통이 쇠머리로 간소화되고, 어로에 종사했던 소리꾼들이 타개하며 등단 과정에서 부르던 배치기 소리도 사라지게 되었다. 마을의 대동계도 사라져 어촌계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도 지정 무형문화재에 지정된 안섬 당제와 달리 외부의 지원이 전무한 것도 문제이다. 당집도 사유지에 위치해 있는 데다 많이 쇠락했으나 보수하거나 개축하기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