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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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唐津-東學農民戰爭勝戰谷戰鬪-偉大-勝利 |
영어공식명칭 | Dangjin Donghak Peasant War and Battle of Seungjeongok |
이칭/별칭 | 당진 동학 농민 운동,당진 동학농민전쟁,당진 동학 농민 혁명,승전곡 전투,승전목 전투,승전항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장수덕 |
[정의]
1894년 당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 농민 전쟁의 전개 과정.
[당진 지역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양상]
내포 지역의 동학은 1880년대 초에 전파되고 18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확산되었으나 1894년 5월 홍주 목사 이승우(李勝宇)가 부임하면서는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승우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고 관군을 동원하여 체포와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내포의 동학 농민군들은 하나의 세력으로 거대화하려는 자구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는 지역적으로 포별 각개활동을 하던 농민 운동을 더 이상 이어가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전국적으로는 이른바 2차 봉기의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포 지역 동학 농민군들의 움직임에 대해 좀 더 분석적으로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 교단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던 내포 지역은, 특히 보은 취회(報恩聚會) 이후 최시형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는 덕포 대접주 박인호를 중심으로 한 거대 농민군 세력으로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4년 9월, 호남에서 전국적인 항일 전선 구축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2차 봉기가 시작되자, 내포 동학 농민군들도 때를 함께 하여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조선 정부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동학에 대한 입장을 강경책으로 변경하였고, 동시에 일본군들은 농민군들을 무력 진압하기 위해 남쪽으로 파견하여, 내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쟁의 위기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자 내포의 동학 농민군들도 그동안 위축되었던 활동을 회복하고, 척왜양 창의(斥倭洋倡義)의 목적에 동참하기 위하여 여미벌[餘美坪][현 서산군 운산면 여미리]에 총집결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여미벌에서는 ‘내포 동학 농민군’이라는 하나의 거대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고, 내포 각지에서 활동하던 동학도들이 여미벌에 총집결하니 그 수가 1만 5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실로 엄청난 숫자의 내포 사람들이 여미벌에 집결한 것이다. 이들은 여미벌에서 창의의 뜻을 바로세우고 기세를 올리며, 대오를 엄중히 하고 식량과 무기를 준비하는 등 조직을 재편하면서 조만간 닥쳐올 전쟁에 대해서도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1894년 10월, 여미벌에서는 동학 농민군의 총봉기에 동참하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동시에 호남 동학 농민군들이 논산을 떠나 공주 쪽으로 진격하는 상황이나, 북접의 손병희 군대가 우금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다는 사실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동안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국왕을 능멸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일본군을 일거에 몰아내고, 반민족적 탐관오리들까지 축출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호남 동학 농민군의 한양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군과 일본군의 방어선이 공주 쪽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해서, 내포 쪽으로 병력이 급격히 분산 배치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술적인 판단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동학 농민군의 총봉기 시기에 맞추어 함께 내포 동학 농민군들도 기포한다면, 최소한의 전투와 희생으로, 이승우가 지키고 있는 홍주를 최대한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고, 기세를 타서 한양까지 진격한다면 호남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척왜 보국(斥倭保國)의 목적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진압군을 격파한 위대한 승리, 승전곡 전투]
여미벌에서 박인호를 중심으로 한 총봉기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무렵, 내포 동학 농민군들은 한양으로부터 진압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드디어 10월 24일, 내포 동학 농민군들은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이하 진압군]를 맞아 현재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곡(勝戰谷)[승전우(僧田隅) 혹은 승전목[勝戰項]]에서 역사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승전곡 전투’이다. 내포 동학 농민군들은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진압군의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연합군이 면천을 출발해 여미로 향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용장천을 따라 도동에 도착해서는 이배산 서쪽의 험한 능선과 반대편 검암산 능선에 미리 매복하였다. 승전곡은 완벽한 S자형 협곡으로 수십m 높이의 바위들이 양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험한 지형이다. 이 협곡을 따라 나있는 샛길이 바로 면천과 운산을 이어 주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내포 동학 농민군들은 바로 이 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압군들은 삼웅리를 지나면서 농민군의 척후병과 맞닥뜨렸으나 간단하게 제압하였고, 승전곡 입구에서도 400여 명의 농민군과 재차 교전을 치르고는 곧바로 승전곡에 다다랐다. 당시 치열했던 승전곡 전투 상황을 사료를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봉 척후가 관군이 행군해 옴을 보고하니 우리는 승전곡 양 산등으로 올라가 복병하고 있었소, 관군이 골짜기 속으로 몰려들어 왔소. 관군이 골짜기를 들어서자 우리는 곧 전단을 일으켜 교전 1시간여에 관군을 여지없이 대파하니…… 여미로 출병했던 병사들이 승전곡에 이르러 겨우 일진을 돌파하고 검암 후봉에 이르렀으나 수만 명이 진을 친 것을 보고 기가 질려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퇴병했다고 한다.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의 도동에 이르러 처음으로 적과 부딪혀서 한 번 싸워 이기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 경병과 일본군이 지세의 험준함을 알지 못하고 급히 험하고 막힌 곳에 들어가 적에게 포위를 당했는데 군사의 수효가 매우 차이가 나서 탈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 도망쳐 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적은 승전곡의 협애를 끼고 방어했으며 그 수가 400명, 500명 되지만 드디어 격파하고 여미의 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적은 사방의 고지를 점령하고 사력을 다해 이곳을 지켰다. 그 수가 각처에 5,000여 명씩 있었으며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이를 공격하려 해도 우리를 포위하고 급습하여 끝내 지탱할 수 없어서 홍주로 퇴각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당시 전투 상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 농민군들은 미리 산 양쪽을 선점하고 매복하였으며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일차 교전하고 패전하는 척 가장하여 연합군을 골짜기 안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방어전을 펼친 내포 동학 농민군의 숫자는 15,000여 명으로 추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자신들의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승전곡 앞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이들도 승전곡의 험한 지형에 매복한 농민군들을 보자 멈칫거렸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과감히 돌파하기로 작전을 변경하고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배산과 검암산의 양쪽 능선을 모두 선점한 동학 농민군들은 열세한 무기와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면서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고 한 시간이 지났지만 농민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연합군은 조금도 진격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질 무렵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을 이용하여 농민군들이 화공을 시작하였다. 거센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앞을 가리자 검암산 쪽으로 진격하던 관군들이 먼저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의 기세마저 급격하게 꺾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도한 동학 농민군들이 용기백배하여 한꺼번에 산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며 압박을 가하자, 진압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에 진압군들은 앞다퉈 쫓겨 가면서 개인의 군장까지 모두 팽개치고 달아났다. 그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승전곡 전투에서 첫 승을 거머쥔 동학 농민군들은 배낭 78개, 상하 겨울 내의 78벌, 휴대 식량 312인분, 일대 78개, 수첩 78개, 깡통과 소금 각각 78개, 쌀자루 78매, 반합 78개, 구두 78켤레 등 다량의 노획물도 획득하였다. 이 승전곡 전투는 내포 농민군들에게 첫 승리로, 일본군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낼 수 있는 대승이었다. 이날의 전투는 농민군들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한 단 두 곳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군과 정면 전투에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전투로도 알려져 있다.
승전곡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들의 승리는, 연합군을 지휘한 일본군들이 내포 동학 농민군들을 너무 얕본 원인도 있겠지만, 이미 엄청난 수와 조직적인 움직임 그리고 전투력 측면에서 이미 이전의 농민군들과는 월등히 달라졌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하지만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홍종식의 증언에 의하면 무기와 군사 훈련 등에서는 아직도 일본군들과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측면이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우리들은 수는 많으나 대개 죽창을 가진 농군들로서 ‘앞으로 갓! 뒤로 갓!’ 한 마디도 못해본 군사들이요. 저들은 새로운 무기를 가진 조련한 군사들이니 접전을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실로 야단났습니다. 그렇다고 여러 수만 명을 가지고 도망할 수도 없고, 대들어 싸울 수도 없고 그때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도망을 하거나 싸우거나 죽기는 일반이니 ‘기왕이면 눈 딱 감고 싸워 보자.’ 하고 일제히 고함을 치며 사면팔방으로 물밀듯 막 내려왔습니다.”
단순히 죽창을 주무기로 들고 징과 꽹과리와 함성으로 무장한 내포 동학 농민군들은, 몇 자루의 화승총에 의지한 채 군사 훈련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전근대적 군사 집단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인원과 군사적인 전략과 전술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들이었다. 당시 승전곡에서 연합군을 지휘했던 아카마츠[赤松國封] 소위의 보고서 기록들을 살펴보면 당시 전투 장면을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려 볼 수 있다.
“초병(尖兵)은 이미 전방 약 1,500m 앞에 있는 벌판에 10명쯤 되는 적을 발견하였다. 그렇지만 거리가 멀기 때문에 더 전진하여 승전곡 좁은 골짜기 서쪽 고지에 이르렀다. 그랬더니 전방 약 500m 앞에 있는 밭에 400~500명의 동학도가 깃발 몇 폭을 나부끼며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동학도 1명이 전진해 왔다. …적에게 일제히 사격을 퍼붓고 …동학도가 허둥지둥 사방으로 흩어졌다. … 오후 3시 30분 머리 위 산정에서 수천 명의 적군이 맹렬하게 사격해 왔으며 게다가 서풍을 기화로 산과 들에 불을 지르고 습격을 해와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오후 4시 산개해 있던 대원들을 순차적으로 퇴각시켰다.”
그가 자신의 첫 전투에서 실패한 과오를 감추기 위해 내포 동학 농민군의 숫자를 부풀리고 전투 상황을 불가항력적으로 보고했다고 추정하더라도, 내포 동학 농민군들이 치밀한 매복·유인 작전과 치열한 전투 과정을 통해서 이룬 승리라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농민군들은 진압군이 면천을 출발하자 처음에는 10명쯤 되는 첨병을 내보내서 연합군을 유인하였고, 또다시 골짜기 밖에서는 400~500명의 인원을 노출시켜서 진압군을 계곡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술이 성공하였다. 더구나 일방적으로 열등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을 이용하여 화공을 퍼부었으며, 무엇보다도 수적 우세를 십분 활용하여 적의 기를 꺾는 치밀한 전략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진압군은 내포 동학 농민군과의 첫 전투에서부터 패전하고 보급 장비와 식량까지 버리고는 허겁지겁 퇴각하였다. 이로써 연합군의 주력인 일본군들의 사기와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농민군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한 내포 동학 농민군들의 모습을 『피란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自午後不知何許賊. 徒數千名自僧田隅歷松巖驅入于. 沔川邑而其羅列之狀如魚貫而進殺. 氣騰天氣勢危凜見甚宏壯也. 列邑吏胥自三班以下至于奴令莫不入賊. 黨所謂守宰不得自由而反以惟從吏胥之令國法解弛等級紊亂人. 皆嘲笑其守令矣. 沔川倅卽瑞山兎洞居趙重夏…今乃聞之棄城避身云聞甚孟浪也…東賊輸穀之牛馬終日絡繹於左右之路去來之匪類不可勝數.”
위의 내용을 해석해 보면 10월 23일 “오후부터 수천 명의 동학 농민군들이 승전곡에서부터 마치 생선을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어 지어 면천읍으로 몰려들어 왔는데, 살기가 하늘을 찌르고 기세가 등등하였다. 주변 고을의 서리들과 삼반 이하 관노와 사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담하였으니 수령들이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서리들의 명령을 따르는 형편이 되었다. 그래도 면천 수령만은 심지가 곧은 자인 줄 알았건만 지금 듣건대 성을 버리고 피신하여 무혈입성을 돕는 꼴이 되었다. 또한 이날로부터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움직이는 우마는 물론 동학 농민군들이 하루 종일 도로 좌우에 이어졌으니 국법은 무너지고 신분질서까지 문란해졌다.”라는 것이다. 이는 승전곡 전투 이후 면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료이며 내포 동학 농민군의 총봉기 이후 이 지역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승전곡 전투 이후에는 이미 면천 지역을 중심으로 내포 지역은 빠르게 동학 농민군들의 지휘 아래 속하게 되었다. 주변 고을 삼반 이하 백성들의 참여는 물론이고 수령들도 모든 권한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포 동학 농민군들은 고을의 자치권은 물론 경제권도 수렴하여 이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비상 전시 체제로 내포 지역 고을들을 편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승전곡 전투는 애초 호남 동학 농민군의 서울 진격의 진로를 막기 위해서 먼저 내포의 농민군을 사전에 토벌하여 추후 있을지도 모를 ‘연합 작전을 사전 봉쇄한다.’는 연합군들의 전략에 차질을 빚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렇게 내포 동학 농민군들에게 면천을 내준 연합군들은 곧장 대천을 따라 덕산 구만리[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로 무조건 퇴각하였고 여기서도 농민군은 진압군을 한 번 격파하였다. 정리하자면 승전곡 전투는 내포 동학 농민군이 총봉기하여 치렀던 첫 전투였으며, 첫 승이며, 대승이었다. 또한 승전곡 전투가 구만포 전투의 승리 요인이 되었으며, 신례원 관작리에서 3만에 달하는 인원이 참가하는 내포 지역 2차 총봉기의 바탕이 되었고 10월 28일 역사적인 홍주성 전투의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파란만장한 산천포 수접주 이창구]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당진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의 수접주 중에는 이창구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창구는 전봉준, 김개남, 최시형, 박인호, 박희인 등과 그 이름을 나란히 하던 내포 동학의 큰 인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면천 출신으로 알려진 이창구를 따르는 무리들을 ‘면포(沔包)’라 부르지 않고 ‘산천포(山川包)’ 혹은 ‘목포(木包)’라고 불렀다. 이는 이창구가 관의 추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이나 포명을 정확하게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그냥 알려진 바대로 목포의 수접주를 자칭하였던 사실만으로 추론하면 이창구는 예산 목시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산천포’라는 명칭도 역시 출신지를 말하는지 여부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른 여느 동학의 지도자가 활동하던 포처럼 ‘산천포’는 특정한 지명이 분명 아니며 다만 활동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조차도 이창구가 자신의 이름과 출신지를 철저히 감추고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이창구를 수식하는 말들이 출신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보다는 활동지에 맞추어져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이창구의 활동 범위가 주로 한 곳에 기대어 있지 않고 넓게 퍼져 있어서 그렇게 불러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연구들에 의해서 이창구의 활동 범위나 활약상이 남달랐음은 확인되었으나 이런 활약상에 비하여 개인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이창구가 활동하고 있을 무렵, 『피란록』에는 당진 지역에서는 동학당들이 “스스로 왜와 양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매일 무기를 지니고 동쪽의 가옥에서 무리를 짓지 않으면, 서쪽 동네에서 작당을 하여 국법과 왕장을 무시하고 방백과 수령을 도외시하였다. 저들 중에 만약 산송이나 채무 혹은 자질구레하게 원한을 갚을 일 등이 있으면 저들이 제멋대로 판결을 하였다. 심지어는 사대부를 묶어 놓고 형을 가하기도 하고, 남의 무덤을 강제로 파고, 채무를 강제로 받아 내고, 근거 없이 강제로 돈을 징수하고, 유부녀를 강제로 겁탈하였다. 양반가의 노비들은 그들의 노비 문서를 탈취하고 상전을 욕보인 뒤에 떠나갔다. 부자들의 돈과 곡식을 빼앗고, 남의 소와 말을 가져갔다. 저들이 갚아야 할 물건들은 모두 탕감하여 준다는 증서를 강제로 받아 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내용은 동학의 폐단을 지적하는 일반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진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이 바로 이창구의 산천포였으니 이런 이야기가 모두 이창구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창구가 활약하였던 면천의 이북은 현재의 송악읍과 송산면 지역이며, 이창구는 현재 송악읍 월곡리에 도소를 설치하고 활동하였고, 숭악산[송악산] 농보성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창구는 처음에 주로 기지시 국수봉에 수천의 군사를 주둔케 하고 매일매일 부하들을 시켜서 관청이나 개인집을 찾아다니며 무기를 수거하고 곡식을 봉고하였다는데, 결국에는 숭악산에 있는 농보까지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창구의 주 활동지는 산천포 도소가 있었던 월곡리를 중심으로 한 기지시와 당진 지역이었지만 이창구의 활동 범위는 당진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이창구는 홍주의 김영필, 정대철, 이한규, 정원갑, 나성뢰, 덕산의 이춘실, 예산의 박덕칠, 박도일, 대흥의 유치교, 보령의 이원백, 남포의 추용성, 정산의 김기창와 함께 내포 동학당 12두령 중에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창구가 거느린 농민군은 15,000~50,000명을 헤아린다는 기록으로 보아 숫자로만 보면 단연 전국 최고의 부대를 거느린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엄청난 이창구의 세력은 당진, 면천 지역뿐만 아니라 홍주, 서산, 광천, 보령에까지 미칠 수가 있었다. 바로 광천에서 활동하던 시장 장사꾼 정원갑이 바로 이창구의 심복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창구 부대 수백 명이 보령의 수영에 들어와 군기를 모두 탈취하여 배에 싣고 갔는데 오후에 옹암과 광천 땅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는 보고서에서도 이창구의 행동반경을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전국에서도 가장 큰 규모이고 내포의 전역에서도 물론 가장 큰 농민군을 가지고 있던 이창구가 이승우의 계략[『홍양기사』에 의하면 홍주 목사 이승우가 이창구의 심복을 회유하고 애첩을 이용하여 함정에 빠뜨린 후 간단히 포박-이송-처형하였다고 함]에 빠져서는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이창구의 세력이 꺾이자 내포의 동학 농민군들의 활동도 단숨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창구가 처형되자 북촌[월곡리]에 모여 있던 동학 농민군들도 더 이상 폐단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내용은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의 상당수는 여미평으로 모여들어 이창구의 원수를 갚겠다고 호언하였다. 때는 또 전국적으로 제2차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던 시기로 내포에서도 동학 농민군들의 통합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던 순간이었다. 이는 여미평에 모인 동학 농민군의 상당한 숫자들이 당진과 면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농민군들로, 곧 이창구의 산천포 농민군들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만큼 내포 동학 농민군들의 총기포 이후 활동에서도 이창구의 비중은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포의 동학 농민군의 활동이나 위상 면에서 초기의 이창구의 역할이 대단하였고, 비록 이창구의 죽음이 초라했지만 그의 영향력이 소진된 것은 아니었다.
끝으로 이창구와 관련되어 동학농민전쟁과 관련된 지역을 먼저 살펴보면 유동과 주변의 갈산을 지목할 수 있다. 『피란록』에 의하면 ‘강, 편, 윤’이라는 동학 두령이 있었는데 강·편 두 사람은 북촌 출신으로 유동과 갈산에서 기포하였고, 그들의 움직임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3,000여 명이 모였다고 하였다. 이는 그들이 활동지가 유동과 갈산 주변이었었으며 이곳이 바로 당진 지역 동학농민전쟁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이들이 이창구가 머물고 있는 월곡에서 집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창구 휘하의 인물들임이 확실하다. 이에 따라 이들의 활동을 유추해 보면 이들은 주로 이곳에서 포덕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군량과 물자를 모으는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들이 갈산에서 양반인 박송도를 입도시켜 접주를 맡기었으나 박송도가 몰래 도망치자 밤중에 무리를 이끌고 찾아와서는 처자를 묶어서 형을 가하고는 집에 불까지 질렀다고 한다. 이에 박송도는 하는 수없이 그들 앞에 나아가 다시 동도에 가담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곳 갈산에서 활동하던 또 한 명의 인물로는 이봉회가 있었다. 『피란록』에 의하면 이봉회는 본래 불량배였는데 지금은 괴수[이창구]를 따라다니며 대장을 자칭하고 부근의 마을에서 갖은 못된 짓을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봉회도 역시 당에서 포덕하고 군량과 물자를 모으는 일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 사람 한명순은 면천 출신으로 면천과 합덕 석교[석우리]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감역 댁에서 여러 차례 트집을 잡힐 때마다 그때그때 뇌물을 주고 모면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시 군량과 물자를 모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 사람 윤치상이 있었다. 『피란록』에 의하면 윤치상은 불량배로 출신으로 추정되나 어디 출신인지 그리고 양반인지 아닌지도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윤치상이 백치에 거처하면서 많은 주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윤치상이 백치에 우거하였던 이유는 이곳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윤치상이 신암을 거처 수리에 장사진을 펼치면서 순식간에 백치 앞에 이르렀고 마을에 들어와서는 여러 겹으로 에워쌓았는데 “항오 부대는 없었으나 철통같았다.”는 이야기에서도 윤치상의 지위나 역할을 짐작할 수가 있다. 윤치상은 농민군을 직접 이끌고 식량과 무기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농민군을 훈련시키는 임무도 맡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윤치상이 백치에 임시로 우거하였던 사실은 무엇보다도 농민군을 무장시킬 수 있는 죽창의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윤치상은 이창구가 농보성을 함락시킬 때 선봉에서 직접 농보의 우두머리를 칼로 찔렀다는 기록에서도 그 역할을 짐작할 수가 있다. 분명 윤치상은 이창구의 휘하에서 선봉 대장으로 농민군을 이끌고 조만간 다가올 총기포에 대비하여 훈련까지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진 지역은 내포 지역 동학농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1894년 초기부터 각 포별로 각개 활동을 전개하는 시기에는 예포의 조직과 산천포의 조직이 활동을 이어 가던 곳이 당진이었고, 특히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력을 지닌 이창구가 바로 당진 출신이며 이창구가 활약하던 중심지도 당진이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2차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에 여미벌에서 조직된 내포 동학 농민군의 주력은 대부분이 이창구 휘하에서 활동하던 당진 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 더욱이 동학농민전쟁사에서 유일하게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여 승리한 승전곡 전투가 있었던 곳도 바로 당진이다. 이렇듯 당진 지역은 내포 동학 농민군이 주력적으로 활동하던 곳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