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서동 대머리 - 전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489
한자 方西洞-
이칭/별칭 죽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가구수 4가구

[청주 한씨 유래]

시조할아버지는 서기 850년에서 900년에서 활동하셨어요, 영동 황간 남곡리에서 출생을 하셔서 여기서 정착하셨어요. …지금서부터 3500년 전까지 올라가야 돼요, 은나라 10대 임금인 무정의 동생이 다스릴 理자가 있어요. 0이의 아들이 기자(箕子)라고 있어요,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정을 안해요,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단군 천 년 후에 바로 기자조선이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은 근거가 있어요. 대만에 대북대학과 북경대학에서 자료를 찾아 국사편찬위원회에 증빙서류를 제출한 상태이다. 그래서 기자조선은 942년 41대가 내려오는데 그 후에 기자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애왕이 연나라(만주 대련) 신하한테 속아서 그 사람한테 나라를 빼앗겨 남쪽으로 내려와 익산에 마한을 세웠다. 무각왕이라고 산소도 있고 왕비 묘도 있다. 큰집이 선우씨, 상당한씨, 지금은 청주 한씨이고, 셋째 분이 행주기씨에요. 그래서 세 성이 합해서 음력 3월 초하루 익산에서 무각왕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백제 무열왕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무각왕이라고 해서 제사를 지내요, 마한은 202년 동안 내려왔어요. 임금은 아홉 분. 그래서 마지막에 계왕의 아들이 삼형젠데 유평, 유량, 유성이에요. 유평이라는 양반이 우리의 직조에요. 모시고 있어요.

후백제에 신라에서 장군 노릇하던 견훤(甄萱)이 전주에 있을 때, 그때 마침 신라가 망하고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울 때란 말이야. 다 왕건한테 투항할 때, 견훤은 안했지. 왕건이 후백제를 쳐 내려올 제 견훤은 이미 왕건한테 투항을 하고 신검(神劍)이라는 큰아들이 고려 왕건한테 대항할 때란 말이야. 그때 왕건이 부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올 제 다행히 이쪽 남들 땅을 지나갈 때 이미, 우리조상들은 견훤한테 망해가지고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남곡리 25번지…그곳에서 태어나셔서 25세까지 수업을 하셨어요. 청주로 오셔서 이 대머리터가 살만하니까, 터를 잡고서 요 위에 방정을 파서 터전을 삼았어요. 농사 용수로 쓰고, 또 무농정을 짓고 남들을 개간하고, 기반을 잡고서 거주하며 부족들을 데려다 농사를 지을 제 왕건이 남쪽으로 내려오다 이쪽으로 통과하는데 개성서 오다보니까 군량도 떨어지고 여기서 주둔을 하게 되는데, 그 소식을 듣고, 휘가 란인 시조가 찾아가서 의사 통합이 되어가지고 몇 해 식량을 먹이고 음료로 식사도 해주고 그래서 같이 부족을 거느리고 종군을 했지. 그래서 견훤의 큰아들 신검을 정벌 한거야. 고려 통합이 됐어요. 그런 거는 남산도서관이나 규장각에 가면 『화벌도』란 족보가 있어요. 거기에는 29명의 충신이 있어요. 거기에는 팔봉산 전투에서 죽은 신숭겸(申崇謙)도 있어요. 왕건이 죽을 뻔 할 때 옷을 바꿔 입었던 사람, 대신 죽었다고. 지금도 팔봉산에 가면 신숭겸 비가 있어요.

『화벌보(華閥譜)』의 29명 안에 우리 시조 할아버지도 끼어 있다고. “벽상공신”으로 있어요. 왕건이 나라를 통합할 때 이 사람들은 잊어버리면 안되겠다 해서 명찰을 만들어서 봤다고 해요. 벽상공신은 아들한테 상속이 되요. 그때는 좋은 벼슬이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터전을 잡고 왕건한테 종군해서 개성으로 갔어요. 여기는 사람이 안사는 지역이 됐어. 돌아가셔서 산소가 남일면 가산리 18번지에 있어요. 그 후손들이 38선 민통선 안에 많이 살았는데…….

(제보자 : 한일환, 남, 1926년생,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

[대머리 마을 유래]

대머리는 와전이 많이 된 거야. 이 마을 이름은 대머리가 아니라 대마을 대촌이야, 큰 마을. 높은 사람들 산동네야. 대머리라고 하는 속칭이 그전에 노인들이 모여서 왜 대머리라고 했는가 그랬는데, 우리 문중에 한글학자 한갑수 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 대자는 청남대니 청와대에 대자에요, 큰집, 높은 사람을 뜻한다. 무농정에서 사셨던 그 당시에는 주변에서 제일 높은 어른이 사셨던 곳이다. 의자왕이 달맞이 하는 만월대니 만월정이니 송월대니 송월정이니 등 그때 주변에서 높은 사람이 사시던 곳이 대야, 여기는 큰 집이 있는 곳에 옆에란 말이야. 그래서 주변인 머리 해서 큰대머리, 지나서 가는 너믄대머리, 지금 있는 무농정을 가리켜서 대머리라고 하는 거야. 벌대머리(평촌)라고 부르고, 우리가 생각할 때는 시조가 사시던 집을 가리켜 대로 하고 주변을 대머리라고 하는 거야.

화당 같은 데는 말바위니, 마암리니. 그래서 우리 대머리의 속칭이 그렇게 된거 아니냐. 지금은 우물로 쓰던 방정을 따서 방정리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 대머리라고 새겨놓은 것도 있는데 노인들도 알고 넘어가야 되지 않느냐 하고 의논한 적이 있다.

(제보자 : 한공구, 남, 1933년생,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452-3)

[방정]

한란이 일족과 이웃을 거느리고 지도자로 이곳에서 감농(監農)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해는 몹시도 가물어 농작물이 타 들어가고 심지어 식수마저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앞산에 단을 쌓고 기우제를 드렸다. 며칠을 계속해서 하늘에 간절히 비를 빌던 한란은 탈진하여 제단 앞에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이 혼미한 중에 백마를 탄 장수가 천군만마를 이끌고 나타나 제단 가까이의 밭머리를 창으로 찔렀다. 그러자 그곳에서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란은 기뻐하며 소리치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아까 꿈에 장수가 창으로 찌른 곳을 파보라고 하였다. 그곳에서는 아까 꿈에서처럼 많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란은 그곳에 네모진 웅덩이를 파 놓고 마을 사람들의 식수와 농업용수로 쓰게 했는데 가뭄이나 장마에 물이 불어나거나 줄어들지를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태봉의 장수 왕건이 후백제를 치고 돌아 가다가 이곳을 들르게 되었다. 한란이 그를 만나보니 꿈에 물길을 찾아준 바로 그 장수였다. 그는 많은 양식을 내놓고 군사들을 흡족히 먹여 주었다. 왕건한란을 데리고 가서 측근에 두어 중용했으며 궁예(弓裔)를 내쫓고 고려를 건국하여 3국을 통일한 뒤 한란에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태위(太尉)의 벼슬을 내렸다.

(제보자 : 한일환, 남, 1926년생,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

[대머리와 한씨]

용개뜰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소유로 농사를 지었으며 왜정 때까지 집안의 농지였다. 그러다가 금점하느라-여기에 금이 많이 나온다.- 많이 팔았다.

중국의 지관인 주사청이 천기를 잘못 봐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마침 사신으로 갔던 이시발(李時發)이 그 이야기를 듣고 황제한테 주를 올려 주사청이를 살려주었다. 이후 생명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이시발의 노후에 살 곳을 찾아주기 위해 진천 땅에 이시발의 땅을 자리잡아주고 그 동생(진영의 장인)-시득-에게 터를 잡아주려고 했을 때 “여기는 청주 한씨가 아니면 안되니 다른 데로 가라”고 해서 고분터인 남일면 고분리로 가서 경주이씨(慶州李氏) 마을을 만들었다. 거기도 60%정도가 이씨(李氏)이다. 그때부터 경주이씨와 청주 한씨가 교류했다.

여기에 내게로는 12대조 할아버지가 진자 영자 할아버진데, 이 양반이 항상 조상 시조할아버지가 살던 곳을 찾으려고 하는데 여기서 4키로 남쪽 고은리 경주이씨네 밭이여, 집성촌이여 이시발이라는 판서가 우리 진영 할아버지가 조카사위가 된다고. 그 이가 노후를 생각해서 여기로 오니까 물색하는데 어떤 노인 할아버지가 “여기는 한씨가 아니면 살 마을이 아닙니다.”고 하자 남쪽에 터전을 잡고 서울 가서 조카사위한테 “내가 대머리에 가니까 한씨 이야기를 하더라, 가서 확인해봐라”라고 해서 벼슬을 버리고 여기에 왔어요. 우물도 있고 무농정터도 눈에 띄고 그래서 그 양반이 대머리를 다시 찾으신 거야. 이게 대머리의 유래야

(제보자 : 한공구, 남, 1933년생,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452-3

한일환, 남, 1926년생,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

[용개들과 무농정]

남들에 이어져 무심천(無心川) 상류 방서동 앞 너른 들을 용개들이라고 부른다. 방서동에는 나말여초(羅末麗初)에 한란(韓蘭)[853~916]이란 이가 살았다. 그가 미개척지였던 이곳을 개간하려고 마음먹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꿈에 황룡이 나타나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하였다. 황룡은 근처에 있는 소(沼)에서 득도하여 승천하려는데 근처에 있는 흑룡이 방해하여 여러 번 실패하였으니 대인께서 꼭 좀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한란이 어떻게 도와주느냐고 묻자 내일 아무 때에 소 근처에 나와 보면 뇌성벽력 속에 우리 둘이 싸움을 시작할 터이니 대인께서 용기를 북돋우는 말씀으로 응원해 주십사하고 했다. 이튿날 그곳에 가보니 과연 그 시간에 뇌성이 크게 울리고 천지가 요란했다. 한란은 큰 소리로 “황룡이 잘한다. 황룡이 세다”고 응원했다. 한참 뒤에 바람이 걷히자 흑룡이 죽어 떨어지고 황룡이 승천하였다. 그날 밤 꿈에 황룡이 다시 나타나 백배 사례하고 대인께서 개간하려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부터 폭우가 종일 쏟아지더니 벌창하는 물이 늪과, 잡초로 무성하던 황무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상류에서 쓸려 내려온 기름진 흙이 덮여졌다. 사람의 힘으로는 벅찼던 개간 사업이 하루 만에 훌륭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용의 힘으로 개척되었다 하여 이들을 용개(龍開)들이라고 불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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