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영원한 지킴이 청주 상당산성과 것대봉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410
한자 淸州-永遠-上黨山城-烽燧
영어음역 Geotdae Beacon Fire Station
영어의미역 Sangdangsanseong Fortress and Geotdae Beacon Fire Station, Everlasting Guardian for the Cheongju
분야 정치·경제·사회/과학 기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산성동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양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인물 숙종(肅宗)|영조(英祖)
길이 24.3m
너비 16.3m
소유자 충청북도
관리자 청주시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구축된 조선시대의 산성과 조선시대의 봉수.

[자연환경]

청주 상당산성것대봉수는 속리산 천황봉(天皇峰)[1,057m]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내려 온 한남금북정맥의 산줄기에 속해 있다. 우암산(牛岩山)[338m]의 동편으로 이어져 있는데, 청원군의 북일면·낭성면과 경계를 이루는 삼각지점에 있다. 청주시 동단부의 높은 산록에 위치하고 있어서 청주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청주 상당산성 최고봉의 높이는 491.2m로 서쪽의 평야지대보다 해발고도가 약 400m 이상 높다. 서쪽으로는 청주시 남부와 북부 및 미호천평야와 증평평야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동쪽은 산과 계곡으로 가로막혀 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산성이 축조된 것이다.

청주 상당산성의 지세는 소백산맥의 지맥이 음성군 부용산 근처에서 정남향하여 내려온다. 백마령(白馬嶺)은 서북쪽의 금강 수계와 동남쪽의 남한강 수계가 갈라지는 분수령으로 괴산군과 청원군의 경계인 좌구산(657m)의 산줄기를 형성한다. 여기서 다시 서쪽으로 뻗어 구녀산과 인경산(582m)을 지나 청주 상당산성으로 이어진다. 청주 상당산성 동남쪽방향의 산맥은 안부를 이루었다가 다시 융기하여 것대산[484.0m], 선도산(仙到山)[547.2m]으로 연결된다. 서쪽으로는 우암산(牛岩山)[338m]으로 이어져 급격히 낮아지면서 무심천과 만난다.

것대봉수청주 상당산성과 같은 한남금북정맥으로 이어져 있는데, 청주 상당산성 남암문에서 남쪽방향으로 직선거리 1.5㎞ 지점에 높이 408m의 산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것대산 봉수터에 서면 청주의 남쪽, 용암동·분평동 일대가 펼쳐진다.

청주 상당산성것대산(484.0m)의 지질환경은 반상화강암에 속하는 화강암계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토질은 주로 암쇄토와 적색황토가 주류를 이룬다.

[발굴/조사경위]

청주 상당산성은 1970년대부터 꾸준한 발굴조사와 복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청주대학교 이원근 교수와 충북대학교 박물관은 각각 1978년과 1982년에 지표조사를 하였는데, 모두 간략한 조사에 그쳤다.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는 1994년에 동장대의 옛터를 시굴 조사하여 보화정을 복원하였으며, 1995년도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서장대의 규모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서장대 혹은 제승당은 15평 규모였다. 2000년에도 성벽보수구간을 중심으로 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산성 복원도 꾸준히 이루어져 어느 정도 조선시대의 산성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2년에는 청주시의 의뢰를 받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북벽의 수구에서 미호문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목적은 2001년 1차 시굴조사를 바탕으로 향후 성벽보수공사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발굴 결과 미호문 밖 고석축을 포함한 성벽구간, 옛 산성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북벽 수구의 집수시설, 건물지 2개소가 밝혀졌다.

이와 같은 발굴 결과 청주 상당산성의 실체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청주 상당산성에는 진동문, 미호문, 공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었다.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보다 확장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성벽의 둘레는 4.2㎞로, 바깥쪽은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고 성벽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져놓았다. 옛 성벽이 가장 잘 남아있는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3~4m에 이른다.

것대봉수흥덕구 산성동의 속칭 거질대산 서쪽 해발 403m 산봉우리에 위치한다. 이 봉수는 전국 5개 봉수 노선 가운데 경남 남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제2노선의 간봉에 속한다. 남쪽의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진천 소을산 봉수에 전달하였다.

것대봉수에 대한 발굴조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995년 8~9월에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하였다. 봉수대의 위치는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 ‘봉화산(烽火山)’이라 표시된 486.1m 고지에서 서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같은 능선상의 443.4m 고지이다. 봉수대의 동쪽은 약간 낮아진 능선으로 이어지고 서쪽은 암벽으로 끊어진다. 이 암벽의 북서쪽은 능선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면은 급경사면을 이룬다. 봉수대는 서쪽의 암벽에서 10.5m 떨어진 작은 산봉우리에 축조되었다.

봉수대의 평면 형태는 능선 방향에 따라 동-서로 긴 장타원형이다. 서쪽면은 둥글고 동쪽면은 약간 뾰족한 평면을 이루어 장란형(長卵形)에 가깝다. 장축의 최대 길이는 24.3m이고 단축의 최대 너비는 16.3m이다. 전체적으로 서단부가 동단부보다 약 130m 높고 북쪽이 남쪽면보다 180m 높아 서고동저, 북고남저의 지세를 이룬다.

봉수대의 외곽에는 봉수대 축대를 겸한 외벽은 높게 쌓고 내벽은 낮게 쌓아 외협축내탁(外夾築內托)한 성벽 위에 여장을 쌓은 듯한 방호벽을 둘렀다. 외벽은 높이가 205~310㎝로서 비교적 높게 쌓았으나 내벽은 125㎝ 정도이다. 외벽은 기저에서 약 180㎝에 이르는 부분 즉 안쪽의 지면에 일치하는 부분까지 70~80°각도로 허튼층 포개쌓기로 석축한 뒤, 위쪽의 방호벽은 수직으로 올려 쌓았다. 내벽은 현재 완전하게 잔존하는 부분이 없서 분명하지 않으나 거의 수직으로 쌓은 듯하다. 석축의 두께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대략 상단부의 두께가 65㎝ 정도이다. 석축에 이용된 석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암계의 잡석으로 전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다.

봉돈은 발굴면적내에 2~3기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유구가 모두 유실되어 정확한 위치나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발굴로 노출된 돌무더기가 주로 북벽에 인접해 있는 상태로 보아 북벽의 안쪽 가까이에 5개의 봉돈이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통형 관이 발견되었는데, 봉돈의 위쪽 연통으로 사용하였다. 주요 유물로는 고려시대~조선시대에 이르는 것들이 출토되었다. 2004년에 봉돈을 조성하고 주변을 정리하였다.

[구조와 특징]

상당(上黨)이란 뜻은 높은 지위의 무리가 있다는 뜻과 주변에 비해 높은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제시대 상당현에서 유래한 듯하며, 현재 청주시 상당구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름 붙여진 청주 상당산성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잘 남아있는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인 석성이다. 둘레는 4.2㎞, 내부면적은 22만평에 이른다. 오목한 분지를 싸안고 등성이를 둘러쌓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다.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설, 김유신 장군의 셋째 아들 원정공(元貞公)이 쌓은 서원술성(西原述城)이라는 설이 있다. 또는 궁예(弓裔)가 쌓았다는 설도 있다.

원래 청주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축성되었는데, 특히 조선왕조 숙종~영조 사이에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다. 오늘날의 산성 모습은 대체로 그 당시에 개보수된 것이다.

조선후기 청주읍성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있었다. 청주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가 있었다. 당시 상당산성에는 남·동·서의 세 문과 수문, 암문과 동장대·서장대, 산성의 지휘관이 거처하는 관사와 여러 부속 건물, 창고, 구룡사(九龍寺)와 남악사라는 두 절, 청심암이라는 암자, 승군 창고, 연못 다섯 군데와 우물 열다섯 개가 있었다. 영조 때는 주둔군이 모두 238명이었고 비축된 양곡은 5,000석 가량이었다. 성안에 절이 있었던 것은 성을 지키는데 필요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승군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규모를 가진 청주 상당산성은 19세기에 점점 퇴락하고 문루도 모두 없어졌지만,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70년 10월 1일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71년부터 성벽과 누문을 복원,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청주 상당산성에는 3개의 큰 문이 있다. 남문은 공남문 또는 공작루, 동문은 진동문, 서문은 미호문으로 부른다.

공남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공남문은 수차례 붕괴되었으나, 1977년에서 1978년까지 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남문의 문 옆벽에는 1802년에서 1836년까지 성을 개·보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공남문 앞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의 사적공원으로 크게 이용되고 있다.

공남문을 들어서면 옹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이것은 남아 있는 용도(甬道)의 일부다. 공남문을 지나 서쪽으로 오르는 성둑 길에는 성둑을 따라 돌멩이가 박혀 있다. 이는 성둑 위에 다시 쌓는 여장(女墻)의 흔적으로, 공남문 서쪽길에 여장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우리말로 ‘성가퀴’라고도 한다. 요철로 된 부분을 통해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되치는 기능을 하였다.

성둑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작은 문이 나타난다. 이것은 비밀통로 역할을 한 암문(暗門)이다. 암문은 남암문과 동암문 두 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청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청주는 물론 증평, 오창, 미원으로 이어지는 벌판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청주 상당산성 서북쪽에 있는 미호문은 이곳의 지형이 호랑이처럼 생겨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치성과 용도의 중간형태를 취하고 있어 주목되며 양옆에는 포루가 가까이 있어 성문을 보호하고 있다. 청주 상당산성의 세 개의 문중에서 적의 침입이 가장 어려운 곳이다.

북쪽 성벽은 미호문에서 직선으로 동북방향 약 300여m 지점에서 시작된다. 상당산(上黨山)[419m] 줄기에서 가장 가파르고 험준한 지형이다. 이곳에는 기우단이 있었다. 지금은 기우제를 지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동쪽 성벽에는 진동문과 동암문, 보화정 등이 있다. 동암문은 청주 상당산성의 동문인 진동문 위쪽에 있다. 이 역시 남암문과 더불어 비밀통로 역할을 하였는데, 암문 내벽에는 ‘양덕부 패장 한량(梁德溥 牌將 閑良)’이라는 명문이 쓰여 있다. 양덕부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청주읍성의 성문을 열어준 장본인이다. 보화정은 동장대이다. 장대란 일종의 지휘소다. 청주 상당산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가 있는데, 지난 92년 동장대가 복원되었다. 또 동쪽벽에는 눈썹돌이라 부르는 미석이 간헐적으로 남아 있다. 미석은 여장의 초석 역할을 하였으며 성벽 끄트머리서 약간 돌출된 모양이다.

청주 상당산성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청주에서 차편으로 가는 길은 청주시~우암순환도로~명암지~명암약수터~산성고개길~청주 상당산성으로 가는 길과 청주시~육거리~청원군민회관~월오동 목련공원~청주 상당산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도보로는 명암약수터에서 곽씨(郭氏) 사당을 거쳐 성의 서남부 능선의 남암문으로 곧바로 올라 갈 수 있다. 또 약수터에서 명암파크호텔 뒷길을 따라 오르면, 제승당 조금 못 미친 서쪽 성벽에 맞닿게 된다.

청주 상당산성 남암문에서 남쪽방향으로 직선거리 1.5㎞ 지점에는 것대봉수가 위치해 있다. 해발 403m의 산봉우리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주목편」에 ‘것대봉수는 청주 동쪽 11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는 거차대(居次大) 봉수라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지에는 거질대산(巨叱大山) 봉수라 표기되어 있다.

봉수란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어 1894년 폐지될 때까지 변방의 긴급한 소식을 횃불인 봉(烽)과 연기인 수(燧)로 알리던 옛날의 통신제도이다.

것대봉수는 조선시대의 전국적인 봉수망 가운데 하나로 경남 남해의 금산봉수(錦山烽燧)에서 출발하여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간 경유지이다. 남쪽으로는 문의(文義) 소이산(所伊山)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所乙山) 봉수에 연결된다. 이곳에는 별장(別將) 1인, 감관(監官) 5인, 봉군(烽軍) 25명, 봉군보(烽軍保) 75명이 소속되어 교대로 봉역을 담당하였다.

것대봉수의 정확한 설치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제도가 완비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봉수지는 동서로 긴 타원형으로 되어 있고, 둘레에는 방호벽(防護壁)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봉돈(烽墩)시설은 현재 민묘 1기가 봉수대지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어 확인할 수 없다. 1998년 11월 20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휴식공간으로서의 청주 상당산성과 것대봉수]

청주 상당산성은 역사문화와 휴식공간이 조화를 이룬 사적공원이다. 청주 상당산성 안의 동장대에서는 매년 시민의 날에 국운융성, 청주발전, 가정화평을 기원하는 삼원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성돌이 행사가 시작된다.

청주시는 1982~1983년에 총 5억8천만원을 투자하여 옛 모습의 한옥 31채를 조성하였으며, 토속음식점 20여 개소가 있어 청주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청주시는 ‘청주 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성곽과 더불어 진동문, 미호문, 공남문 및 치성, 동장대 등을 복원하였다. 이 사업은 2010년까지 모두 3백87억원을 들여 추진된다. 관아는 물론이고 병기고, 포루, 민가, 절(구룡사(九龍寺), 남악사)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 이외에도 전통무예관, 전통놀이마당, 씨름장 등을 마련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과 휴식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것대산 봉수터는 청주시 근교의 유일한 봉수터로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 중의 하나이다. 요즘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전설]

청주 상당산성것대봉수와 관련된 전설은 청주 상당산성의 경우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것대봉수와 직접 관련된 전설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은 이인좌의 난 때 일어난 이야기로 다음과 같다.

이인좌의 무리가 군사를 일으킬 무렵 것대봉수의 봉수지기는 목씨 성의 노인이었는데, 목노인은 선이라는 외동딸을 데리고 봉화대를 돌보고 있었다. 선이는 자라면서 동네 청년인 백룡 총각과 정혼을 한 사이였으나 홀로 남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리저리 날을 미루고 지냈고, 백룡 총각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마음에 수시로 봉화대를 들락거리며 목노인의 일을 거들어주고 있던 터였다.

이인좌의 무리는 군사를 일으켰을 때 봉화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병사들을 것대봉수로 보냈다. 반군의 병사들은 곧바로 봉수지기인 목노인의 집을 습격하여 목노인을 죽였다. 한편 선이는 청주장에 나간 백룡 총각을 기다리기 위해 고개마루에 나가 있었는데, 병사들이 집으로 가는 것을 수상히 여겨 지켜보다가 목노인을 해치는 것을 목격하였다. 놀란 선이는 곧바로 봉수대로 달려가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자 반군의 병사들은 다시 봉수대로 쫓아 올라가 선이마저 죽였다. 이때 장에서 돌아오다 봉수대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달려온 백룡 총각은 선이의 죽음을 목격하고, 반군의 병사들에게 달려가 격투 끝에 해치우고 봉수대에 불을 지피어 청주에 반란군이 일어난 것을 알릴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청주 상당산성은 1970년 10월 1일 사적 212호로 지정되었다. 청주 상당산성은 둘레 4.2㎞이며, 성내면적은 22만평이다. 3개의 성문과 2개의 암문, 그리고 3곳의 치성을 갖추고 있으며, 성내에 커다란 연못이 1개소가 있다. 충청도를 대표하는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청주 상당산성은 전국에서 원형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산성의 하나이다. 성곽과 더불어 진동문, 미호문, 공남문 및 치성, 동장대 등이 복원되었다. 앞으로 관아는 물론이고 병기고, 포루, 민가, 절(구룡사, 남악사)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 역사의 산 교육장과 자연학습체험장으로, 그리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계속 활용될 것이다.

것대봉수는 문의 소이산(所伊山)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진천 소을산(所乙山) 봉수로 신호를 넘겨주었다. 이 봉수는 세종대 이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청주 근교의 유일한 봉수이다. 2004년 문화시민단체는 것대산 봉수터에서 전국 봉수연결을 거행하였다. 이는 청주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개발하고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영문본문]

This is a walled mountain town built of the stones found easily around the valley of this boundary. Originally, this was the mountain fortress piled up of earth in the Baekje Dynasty (one of three ancient and advanced kingdoms of Korean peninsula) Era. A citation, from the History of Three Dynasties called Samguksagi in Korean: the construction of a walled city named Seowonsulseong by order of a general, the third son of kim Yusin (a contributing commander-in-chief of the Silla for winning the victory to competitions among three kingdoms), has some experts and scholars conjecture the building period of the Sangdangsanseong to be the early of the Unified Silla Era. Sangdang is an ancient name of Cheongju city at the present day and especially this region was called Sangdang from the time of the Baekje Dynasty. This fortress had the experience of two times reconstruction works in the Joseon Dynasty: one is the time of after ending the war against Japan called Imjinwaeran broken out in 1592 and the other the 42nd year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A.D.1716) - particularly this was rebuilt of stones, new material again in the year. Granite shaped four corners was used in the erection of castle wall remained in a good condition but low fence piled up on the top of the castle wall was never seen. There must have been five ponds, three Buddhist temples, a building of government office and a warehouse in the castle and now, still gate and low wall left over in there. The top of this castle has good visual angle, in particular in the direction of the west. It teaches people that the political and military purpose of the castle is the defense of this region from the attack of an enemy at that time. This has been a position of strategic importance to the national defense since the Baekje Dynasty, especially in the Joseon Dynasty Era.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5.04.14 항목명 수정 상당산성->청주 상당산성으로 수정(2015.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