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우리의 땅이름 방아다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408
영어음역 Bangadari Field
영어의미역 Bangadari Field, A name that has been recovered
이칭/별칭 반다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3가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석린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3가, 예전의 ‘오정목(五町目)’에 위치한 들.

[지명유래]

방아다리북문로3가, 예전의 ‘오정목(五町目)’에 위치한 들이다. ‘반다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방아다리’이든 ‘반다리’이든 ‘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3년 일본식 지명을 우리 고유의 지명으로 고치자는 취지로 청주문화사랑모임에서는 '방아다리'라는 지명의 푯돌을 세웠다. 이 푯돌에는 지금은 복개가 된 교서천(校西川) 변에 방앗간이 있고, 그 옆에 다리(橋)가 있어 이렇게 불렀다고 쓰여 있다. 즉 하천 위에 놓인 ‘다리(橋)’로 착각한 것이다. 방아다리의 다리가 ‘교(橋)’의 ‘다리’와 어형이 일치하고, 마침 이 곳에 ‘교서천’이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다리(橋)’와의 연상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하천 변에 방앗간이 있었고 근처에 다리가 놓여 있었기에 그 다리를 ‘방아다리’라 불렀다고 믿고 있다. 청주문화사랑모임에서 세운 푯돌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나 ‘방아다리’는 교량(橋梁) 이름이 아니라 들 이름이다. ‘방아다리’나 ‘반다리’의 다리는 ‘교(橋)’가 아니라 ‘야(野)’를 뜻하기 때문이다. ‘다리’는 ‘들(野)’이라는 단어와 관련된다. 들은 지명에 따라서는 ‘달’ 또는 ‘드리’, ‘다리’로도 실현된다. ‘달안이(들안)’의 달, ‘마드리’, ‘배드리’의 ‘드리’, ‘긴다리’, ‘방아다리’, ‘배다리’, ‘삽다리’, ‘쪽다리’ 등에 보이는 다리가 그러한 예이다. 이들 지명에서 보듯, 다리는 지명의 후행 요소로서 ‘들’을 지시한다.

방아다리가 들 이름이라는 사실은, 전국에 들을 지시하는 ‘방아다리’가 널리 분포하는 현황으로도 증명이 된다. 전국에 ‘방아다리’라는 지명이 꽤 많은데 대부분 ‘들’을 지시한다. 청주시 율량동, 죽림동, 외북동에 있는 ‘방아다리’도 ‘들’을 지시하고, 가까이 있는 보은군 외속리면 구인리의 ‘방아다리’, 진천군 초평면 오갑리에 있는 ‘방아다리’도 ‘들’을 지시한다.

‘다리’ 대신 ‘들’로 나타난 ‘방아다리’이라는 지명이 ‘방아다리’와 함께 쓰이는 사실도 ‘다리’가 ‘들’임을 분명히 해 준다. 전국에는 방아다리에 못지않게 ‘방아다리’이라는 지명이 다수 존재한다.

‘방아들’은 지역에 따라 ‘방아드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방아드리’는 ‘방아들’에 접미사 ‘-이’가 결합된 어형이다. ‘방아다리’는 바로 ‘방아드리’에서 제3음절 ‘드’가 ‘다’로 변한 어형이다. ‘드’가 ‘다’로 변한 것은 ‘드’에 선행하는 ‘아’의 모음에 이끌려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방아들〉방아드리〉방아다리’의 어형 변천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방아들’이 ‘방아들’로 나타나는 지역도 있다. 그렇다면 ‘방아다리’를 ‘방아달’에 접미사 ‘-이’가 결합된 지명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방아달’이라는 지명 자체가 아주 드물기 때문에 ‘방아다리’를 ‘방아달’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보다는 ‘방아드리’와 관련하여 이해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방아다리’의 선행요소 ‘방아’는 ‘곡식을 찧거나 빻는 기구’이다. 구체적으로는 ‘디딜방아’를 가리킨다. ‘디딜방아’는 굵은 나무 한 끝에 공이를 박고, 다른 한 끝에는 두 갈래의 발판을 단 구조이다. 공이만 빼고 보면 와이(Y)자 모양을 하고 있다. ‘들’의 이름에 ‘방아’가 이용된 것은 들 모양이 ‘디딜방아’의 몸체와 같이 와이(Y)자 모양을 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따라서 ‘방아다리’를 ‘방아다리처럼 생긴 들’로 해석하여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방아’를 포함하는 ‘방아고개’, ‘방아골’, ‘방아논’, ‘방아미’, ‘방아봉’, ‘방아샘’, ‘방아실’, ‘방아재’ 등도 지형이 방아 형국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된다.

한편, ‘방아다리’를 ‘반다리’로부터 와전되어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청주읍성(淸州邑城) 북문(北門) 밖으로 나가면 해자(垓子, 성 주위에 둘러 판 못)가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다리가 ‘반다리’이고, 이 ‘반다리’가 와전되어 오늘날의 ‘방아다리’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반다리’ 와전설(訛傳說)은 북문 밖 해자의 위치와 ‘방아다리’의 현재의 위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뿐더러, ‘반다리’가 변하여 ‘방아다리’로 되는 것은 음운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따라서 ‘반다리’를 ‘방아다리’와 결부시켜 이해하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명칭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반다리’는 ‘반’과 ‘다리’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후행 요소 ‘다리’에 대해서도 ‘방아다리’에서처럼 ‘교(橋)’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나, 이 또한 ‘들’이 변한 것이어서 ‘야(野)’의 뜻이다. ‘반다리’는 ‘반들’로부터 ‘반드리’를 거쳐 나온 어형이다. ‘반들〉반드리〉반다리’의 변천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행 요소 ‘반’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한자 ‘반(半)’으로 보고 거리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반다리’가 사주면(四州面)[1963년 청원군과 청주시에 편입]과 청주읍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 해석이다. 이에 따라 ‘반다리’를 ‘거리상 중간이 되는 위치에 있는 다리’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반’은 ‘소반(小盤, 음식을 놓고 먹는 작은 상)’을 뜻하는 ‘반(盤)’일 가능성이 높다. 중세국어에서 ‘반(盤)’은 ‘소반’을 뜻하였다. ‘다리’가 ‘들(野)’과 같으니 ‘반다리’는 ‘소반처럼 생긴 들’로 해석된다. ‘소반들’이라는 지명이 전국에서 몇 군데 확인되어 ‘반들’과의 관계가 뚜렷해진다. ‘소반’은 편편하고 민틋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반’을 포함하는 ‘반고개’, ‘반바우’, ‘반산’ 등도 고개·바위·산 등이 소반처럼 편편하고 밋밋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들에 대해서도 ‘소반고개’, ‘소반바우’, ‘소반산’ 등이 대응되어 쓰인다.

이렇게 보면, ‘방아다리’나 ‘반다리’는 ‘들’의 형상에 기초해서 명명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방아다리’는 ‘방아’의 모양과 연계 시키고, ‘반다리’는 ‘소반’의 모양과 연계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한편, ‘오정목다리’를 ‘방아다리’나 ‘반다리’와 동일하게 보는 시각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오정목다리’는 그야말로 ‘오정목(五町目)’을 지나는 교서천(校西川)에 놓인 ‘다리(橋)’이다. ‘방아다리’나 ‘방아다리’의 ‘다리’를 ‘橋’로 잘못 본 나머지 ‘오정목다리’를 이들과 동일 지명으로 오해한 것이다.

방아다리’와 ‘반다리’는 들(野)의 이름이고, ‘오정목다리’는 다리(橋)의 이름이어서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변천]

현재 ‘방아다리’라고 불리고 있는 이 지역은 원래 조선 영조(英祖) 후반 이래 ‘청주목 북주내면 원리(淸州牧 北州內面 院里)’라 부르던 곳인데 대한제국(大韓帝國)시대에 원리(院里)가 원리와 북리(北里)로 분리 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원리의 일부를 성서정(城西町)과 서주면(西州面)의 교서리(校西里)로, 북리의 일부를 북정(北町)으로 넘겨주고, 원리와 북리의 남은 지역을 청주면 본정오정목(淸州面 本町五町目)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방이후 1947년 일본식 동명을 폐지하고 이곳에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북문로[옛 玄武門]가 있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북문로3가로 고쳤으나, 최근까지도 일제시대의 잔재로 오정목이라 불리었다. 이에 청주문화사랑모임에서 1993년 바른 지명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방아다리’라는 푯돌을 세우고, 오정목 대신 방아다리라는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현황]

한일합병 후인 1914년 일제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기존의 청주군(淸州郡)청주면(淸州面)과 사주면(四州面), 북일면(北一面), 북이면(北二面), 미원면(米院面), 낭성면(琅城面)으로 개편하였고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사주면의 일부를 청주에 편입하여 1931년 청주읍(淸州邑)이 되었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는 행정조직을 일본식으로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청주읍성을 도시계획이라는 미명아래 헐은 후 남문에서 남북으로 뻗힌 간선도로를 6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 이정목(二町目) 식으로 불렀는데 그 다섯 번째 구간이 지금도 일명 텍사스촌으로 회자되는 오정목(五町目)이다.

일정목에서 육정목까지의 중심이 되는 거리를 통칭 본정통이라 했는데, 이 용어가 오정목과 최근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1993년에 청주문화사랑모임에서 방아다리라는 우리 말 표석을 해 세웠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오정목 또는 텍사스촌이라는 용어로 더 많이 불려진다.

수아사 뒤쪽에 있던 건널목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스스럼없이 후미기리라 불렀고 마루보시는 중앙시장 위쪽 옛 청주역 앞에 있던 대한통운 사무소 전신을 일컫는데 현재 이 용어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영동(榮洞)은 일제 때 ‘영정’이었는데 근처의 무심천(無心川) 제방에는 벚꽃이 많다하여 사쿠라 마찌라 했다.

광복 후인 1947년 동명(洞名)변경에 의하여 본정 1정목, 본정 2정목을 남문로1가(南門路一街), 남문로2가(南門路二街)로, 욱정 1정목과 문회리와 도하정을 합해 서운동으로, 욱정 2정목, 욱정 3정목과 상생정, 남정(南町), 청수정, 대흑정, 시장정, 신장대를 합해 남주동(南洲洞)으로 개칭하였다.

오늘날 남문로, 북문로는 본래 거리 이름 외에도 중앙로, 성안길 등으로 통칭되어, 본정통이라는 이름을 청산한 듯 보이나, 방아다리는 아직도 오정목으로 많이 불리고 있어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할 과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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