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291
한자 音樂
영어음역 eumak
영어의미역 music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현

[정의]

소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시간 예술.

[개설]

우리나라 3대 악성 하면 거문고를 창제한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과 가야금을 제작한 신라의 우륵(于勒)[500?~562?], 조선의 박연(朴堧)[1378~1458]을 든다. 그 중 우륵박연은 충북 출신 음악가이다. 청주 지역의 음악은 이 위대한 전통음악의 얼을 계승, 보존하는 반석위에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해방 전까지의 양악]

한국 최초의 서양음악은 언더우드(H. G. Underwood)[1859~1916]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1858~1921]의 선교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육기관을 설립한 선교사들은 선교와 더불어 찬송가와 음악교육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음악교육이라야 찬송가 외에 쉬운 외국민요 같은 노래를 가르치면서 창가라 했다.

청주 지역에 양악이 받아들여진 시기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찬송가나 찬양가가 따랐을 것으로 본다.

상당구 탑동에 터를 잡은 미국인 원진희(선교사)는 한국에 최초로 서양음악을 심어준 언더우드의 후손이다. 이 후손들이 청주에 머문 것은 1986년경까지로 추산되며 현 일신여자고등학교 위치에 있었다.

원진희는 청주에 머무르는 동안 교외음악 약사를 펴냈으며 1958년 11월에는 비올라 독주로 현대극장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음악 공부를 원하는 학생들에게는 바이올린을 지도하여 대학에 진학시키기도 하는 등 청주 지역 음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광복 직후의 충북음악]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는 낡은 음악과 새 음악을 가리게 되었다.

친일 왜색의 전시체제의 군가, 유행가가 자연히 사라지고 해방의 즐거움과 함께 민족혼을 달래는 박력 있고 진취적인 국민가요가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곡으로 김성태(金聖泰)의 「독립행진곡」, 이흥렬(李興烈)의 「해방의 노래」, 나운영(羅運榮)의 「건국의 노래」 등이 나와 우리 민족의 진로를 밝혀주었다. 또한 일제 치하에서 은밀하게 불러야했던 홍난파(洪蘭坡)의 「봉선화」, 「옛 동산에 올라」와 윤석중(尹石重)의 「반달」 등 식민지배의 한과 독립의 염원을 담고 있던 가곡들을 마음놓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광복 후 청주음악계는 학교를 중심으로 예술제나 합창발표, 독창, 피아노, 기악 등의 행사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이 학교음악회 외에 군인들의 군악대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청주사범학교청주상업학교 악대의 활동이 중심축을 이루었다.

1949년에는 문교부에서 전국 남·녀고등학교 음악발표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충청북도에서는 이상덕이 지도한 청주사범학교의 관악대가 출연하여 충청북도의 음악역량을 과시하였다.

이는 충청북도의 관악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주사범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이호섭(피아노), 박승호(성악), 정태규(성악), 양명환(피아노) 등은 청주의 음악적 지위향상에 기여했으며, 청주사범 출신인 김하경(피아노), 김승호(작곡), 이규철(피아노), 강대숙(성악)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신수정(경원대학교 교수)과 유회자(캐나다) 등이 청주 출신 연주가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고 있다.

[한국전쟁 후 충북음악]

한국전쟁으로 음악계도 음악활동을 할 인적자원과 시설, 악기가 빈약해지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음악활동을 재건하려는 노력 또한 실의에 잠긴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청주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던 김하경은 각급 학교의 음악교사들을 주축으로 합창단을 조직하였다. 합창단은 여러 음악회에 출연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전후의 시달림과 갈등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었다. 김하경의 서울 전출로 합창단은 지속되지 못하였지만, 남은 음악인들에 의한 음악회로 이어졌다.

이때 김하경의 「6·25 노래」, 「통일행진곡」, 박태현의 「중공 격멸의 노래」, 이흥렬의 「승리의 노래」, 김생려의 「대한의 노래」, 박태현의 「오 낙동강」 등이 국민가요로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불렸다. 특히, 당시 유명 성악가인 김천애가 청주대학교 강당에서 「오 낙동강」을 불러 청주시민들의 상흔을 달랬다.

[충북음악협회 주도의 청주음악]

1954년 2월 28일 문화인동호인연합회 결성으로 축하음악회를 동아극장(현 상당공원)에서 열었다. 음악회를 위하여 문총음악분과를 구성하였는데, 위원장 이상덕, 부위원장 박인규, 강대숙, 총무 박유직, 기악 남상훈, 성악 김순, 작곡 정원직 등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가 바탕이 되어 1957년에 청주음악인협회, 1958년에 한국음악협회 충북지부로 개편되었다. 임원에는 초대 지부장 이상덕, 부지부장 임재문, 김호익, 총무 이상두였다. 1962년에는 임재문이 제2대 지부장을 맡았으나 다음해에 이상덕이 3대 지부장에 재선되었다.

당시 연주회장은 청주극장(현재 상당구 남문로2가 상설할인매장 덤프 자리)과 현대극장(현재 남문로2가(南門路二街) 청주백화점 자리)이 가장 큰 객석을 가진 발표회장으로 활용되었고, 학교 강당이나 교육회관(현재 교육회 사무실)의 활용이 많은 편이었다.

이후 중앙공원(中央公園) 안에 설립된 시민관이 연주회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시민관은 당초 ‘화요강좌’라는 이름으로 공무원들의 재교육 및 새마을 교육장으로 쓰였던 시설이었다. 노천극장으로 시작되었던 이 시민관은 이후 지붕을 씌워 998석을 갖춘 유일한 공연장 구실을 하였다.

또한, 충청북도와 청주시에서 「충청북도민의 노래」, 「청주시민의 노래」를 제정하고 이를 보급하였다. 「충청북도민의 노래」는 작사를 이은상에게, 작곡을 김동진에게 의뢰하였고 이때「탄금대의 노래」, 「우리 속리산」 등이 작사, 작곡되었다. 당시 이것을 레코드로 제작하였는데 테너에 김동진이, 소프라노에 박옥련이 취입하였다.

그 뒤 청주시에서는 「새마을 노래」와 「청주시의 노래」(오동일 곡) 등 추가한 10여곡을 박진, 채완병, 한인숙 등이 노래하고, 지휘는 이상덕이 담당하여 도내 시, 군 단위로 곳곳에 보급, 계몽하였다.

한편 음악협회는 각종 음악회를 개최하고 교사합창단을 주도하면서 회원들의 대동단결과 친목을 꾀하며 지방음악의 육성과 신인들의 인재발굴에 역점을 두고 일해 왔다.

1972년 3월 충북예술인총연합회 충북지부장이었던 김은수가 임기 도중 사임하여 이상덕이 충북지부장으로 피선되어 자동적으로 한국음악협회 충북지부장에서 물러나게 되고 4대 한국음악협회 충북지부장에 이상두(클라리넷, 고교교사)가 피선되었다.

향토 음악인들의 꾸준한 노력은 마침내 그 열매를 거두었는데 그것은 바로 숙원이었던 대학 음악과의 신설과 관현악단의 태동이었다.

한해에 3~4회에 각종 음악회를 주관하면서 후진 육성에 힘쓰고 있으며, 특히 1959년부터 시작된 초·중·고교 학생음악경연대회는 그 빛나는 전통으로 중부권의 권위 있는 음악경연대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전문 음악인을 배출하기 위하여 1970년 청주여자대학(현 서원대학교 음악과), 1973년 청주대학교 사범대 음악교육과, 1985년 한국교원대학교 음악교육과, 1992 청주과학대학 생활음악과가 신설되어 지역 음악발전의 큰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음악인들의 배출은 합창단, 관현악단 등 지역에 전문 연주단체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시립교향악단, 시립 합창단 등 시립예술 단체의 조직의 태동으로 이어진 계기가 되었다.

1999년 2월에는 KBS청주방송국에서 어린이 합창단을 지휘하고, 청소년 단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황주복(세광고 교사)이 청주음악인협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침체되어 있는 창작 음악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99년 4월 충북작곡가협회(회장 이영철) 회원들의 작곡발표회를 열어 창작의 풍토를 진작시켜 나갔다.

2003년에는 오선준(청소년교향악단 지휘자)이 제 4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청주지역 음악 활성화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초등학생음악경연대회’, ‘당간음악제’, ‘가을맞이 가곡의 밤’ 등 음악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청주음악인협회는 현재 161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국악 분야]

해방후 국악 분야는 1948년 3월 청주에서 국악동호인들이 전통국악예술을 전승·보전하기 위해 청주농악대를 만들고 시조인들이 모여 청주시조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968년 5월에는 국악인들이 모여 한국국악협회 충청북도지부를 결성하여 보다 체계화된 조직속에서 국악의 전반적인 발전향상과 문화적 유산의 보호 육성을 벌여 나갔다.

1980년대 초 일부 국악인이 고인이 되면서 이승구가 국악을 발굴하여 한국국악협회 충청북도지부에 국악기능별로 가야금분과, 무용분과, 민요분과, 기악분과, 민속분과, 시조분과, 농악분과 등의 기구(분과)를 설치하였다. 1985년에는 청주시립국악단을 창립하게 되었고 1986년에는 청주농악대를 창설하였다.

교육기관으로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에 국악과가 신설되었고, 서원대학교에 음악과(국악반)이 신설되었다. 청주에 충북국악원(원장 유시라) 등이 신설되어 지방국악예술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청주농악대는 1987년 3월 청주시립농악대로 명칭을 바꾸며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거두었다.

청주농악은 1992년 10월 23일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제6회와 제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각각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엮고, 제35회 대회에서는 한국예총회장상을 수상하는 등 높은 음악성과 보존성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한국국악협회 충청북도지부에 박용환을 대표로 가야금분과, 무용분과, 민요분과, 기악분과, 민속분과, 시조분과, 농악분과 등의 분과를 설치하고, 31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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