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지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600
한자 鄕土誌
영어음역 Hyangtoji
영어의미역 Local Chronology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강민식

[정의]

역대 청주의 사정을 기록한 지리지.

[개설]

지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전근대 시기 중앙집권적 수취체제의 기초로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도·시·군지, 마을지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사정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연원]

전근대 시기의 향토지는 주로 중앙의 관 주도로 이루어진 수취를 위한 지방의 사정을 기록한 지리지에서 비롯된다.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기획과 편찬이 이루어져 보다 자세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변천]

지역의 역사 전개에 대한 이해는 삼국의 역사를 다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조선 초기에 정리된 『고려사(高麗史)』의 지리지를 통해 소속 국적의 변화와 군현의 치폐(置廢) 등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지역에 대한 이해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와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두 조선이 건국 이후 수취를 전제로 한 지방에 대한 사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후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여지도서(輿地圖書)』는 관찬 사서로서 국가 주도의 향토지로 완성되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각종 읍지(邑誌)의 편찬이 활발해 지면서 보다 광범위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이 또한 국가 주도의 편찬 사업으로 일정한 편목에 의해 정리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물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특징을 보인다.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지리지의 편찬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1692년 전후에 편찬된 『호서승람(湖西勝覽)』이 있으나 내용이 너무 소략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을 거치면 소실에 따른 결과로 보여진다.

영조 이후의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낭성지(琅城誌)』, 순조 때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 『청주읍지(淸州邑誌)』, 『충청북도각군읍지(忠淸北道各郡邑誌)』 등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이후의 사실을 추가하거나 생략한 것으로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

사찬 지리지인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5)는 간략한 내용과 함께 전고(典故) 등 역사지리적 해석 위주로 정리하였다.

최근 번역 간행된 1829~1834년 사이에 간행된 또 다른 『청주읍지(淸州邑誌)』는 필사본으로, 병영의 역대 병마절도사 명단과 상당산성 병마우후 명단, 청주목사나 서원현감 명단인 관안(官案)이 비교적 자세하고, 군현 강등과 복구에 대한 사실도 자세하여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일제시기에 편찬된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1933)은 앞선 지리지의 편찬 체계를 유지하면서 일제강점기의 변화된 모습을 첨부하고 있다.

[역사적 관련사항]

청주는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땅으로 삼국이 정립된 뒤 백제에 속했다.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백제 때의 상당현(上黨縣)이라 한 뒤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삼국이 서로 다툼을 벌이던 시기에는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어 통일신라로 이어졌다. 685년(신문왕 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었고 곧 서원경이 되었다. 후삼국기에도 이 지역은 궁예(弓裔), 왕건(王建)견훤(甄萱)이 다투던 곳으로 부각되었다.

고려 때인 940년(태조 23)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983년(성종 2) 처음 목(牧)을 설치하였다. 995년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전절군(全節軍)이라 부르고 중원도(中原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1년(현종 3)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대신하였고, 1018년 8목을 부활하면서 목이 된 후 조선에 이어졌다.

조선시대 지리지의 건치연혁(建置沿革)은 1449년(세종 31) 관찰사로 하여금 판목사(判牧事)를 겸하게 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는 기록과 세조 때 진(鎭)을 설치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강상(綱常), 반역(叛逆) 등의 죄에 따른 군현 강등·복구 사실을 밝히고 있다.

[구성과 형태]

지리지는 대체적인 군현의 연혁에 대한 사실과 함께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이르러 점차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는 연혁에 이어 속현(屬縣), 향(鄕), 소(所), 사경(四境), 호구(戶口), 군정(軍丁), 성씨(姓氏), 인물(人物), 풍토(風土), 간전(墾田), 토의(土宜), 도기소(陶器所), 읍성(邑城), 역(驛), 봉화(烽火), 월경처(越耕處), 소속군현(所屬郡縣) 등 앞선 지리지에 비해 보다 구체적인 서술이 이루어졌다.

또한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는 고려시대의 유풍을 짐작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성씨, 향·소·부곡 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르러 지리지 편찬은 완성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앞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이어 보다 진전된 체계를 갖추었다.

건치연혁, 속현, 진관(鎭管), 관원(官員), 군명(郡名), 성씨, 풍속, 형승(形勝), 산천, 토산(土産), 성곽, 봉수(烽燧), 누정(樓亭), 학교(學校), 역원(驛院), 교량(橋梁), 불우(佛宇), 사묘(祠廟), 총묘(塚墓), 고적(古跡), 명환(名宦), 인물, 제영(題詠)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조선 말기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국초에서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지방통치체제에 대한 이해와 전시대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모습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 관찬의 지리지의 대표격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진관, 사계(四界), 방리(坊里), 건치연혁, 군명, 형승, 성지(城池), 관직(官職), 산천, 성씨, 풍속, 능침(陵寢), 단묘(壇廟),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교량, 역원, 목장, 봉수, 누정, 사찰(寺刹), 고적, 인물, 조적(糶糴),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俸廩), 군병(軍兵)으로 구분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방리조를 나누어 방위에 따른 면·리의 편호(編戶)와 인구(人口)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갖추고 있어, 수취를 위한 적극적인 호구조사의 결과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제언을 크게 부각한 점이나 말미의 수취 관련 자료도 주목된다.

[현황]

해방 이후 지방자치단체에 의한 최초의 향토지는 1961년 조건상(趙健相)에 의해 편찬된 『청주지(淸州誌)』로부터 출발한다. 『청주지(淸州誌)』는 역대 개요와 함께 앞선 조선시대의 지리지의 편제를 그대로 수용하여 정리하였다. 다만, 독립운동 사실과 현대편을 추가하였고, 청원군편과 문의구지(文義舊誌)를 독립하여 기술하였다. 전체적으로 최초의 현대적 시지(市誌)라는 의미와 함께 역대 지리지의 종합편이라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시지의 편찬은 1976년 간행된 『청주시지(淸州市誌)』이다. 내용은 총설·역사·지리·행정·사법경찰·선거·산업경제·교육·문화·종교·민속·명승고적·인물 등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앞선 『청주지(淸州誌)』에 비해 현재적 상황을 최대한 기술하여 정치적인 의도도 배제할 수 없다.

1997년에 간행된 『청주시지(淸州市誌)』(상·하)는 1976년의 『청주시지(淸州市誌)』 이후 20년간의 시정 전반과 발전에 따른 내용을 포함하였다. 목차는 자연환경, 인문환경, 역사, 문화유적, 풍속, 교육, 종교, 문화, 산업경제, 행정, 사법, 정치, 사회, 인물의 순서이다.

청주시는 산업화의 진행과 함께 옛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선 곳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2000년에 간행된 『봉명·송정동지』는 청주산업단지가 들어선 지역에 대한 옛 모습을 최대한 복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봉명동송정동이 자리잡은 지리환경, 역사와 간직한 문화, 민속, 사회시설과 산업, 도시계획, 개발의 발자취 등으로 구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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