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상업학교 국방경기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540
한자 淸州商業學校國防競技-
영어공식명칭 Defense Sports Team of Cheongju Commercial High School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연도/일시 1940년연표보기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주상업학교에 있었던 국방경기팀.

[설립목적]

1930년대 후반 일제는 대륙침략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전력증강의 일환으로 모든 구기대회를 중단시키고 국방경기를 창안하여 의무적으로 참가토록 했다. 국방경기대회는 외적으로는 일종의 신체단련과 협동심을 배양하는 운동이었지만 학생들을 전투요원화하여 대륙침략의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위장대회(僞裝大會)였다. 모든 일반경기대회를 중단시키고 이 경기만을 강제로 보급하여 참가하도록 했다.

[활동사항]

청주상업학교는 1940년 대회부터 국방경기대회에 참가하여 한국대회 3회 우승과 전일본학생대회에서 한국대표팀으로 3회나 행군종목에서 우승하여 민족적 긍지를 높였다.

청주상업학교의 국방경기우승은 당시 체육교사인 오석구의 헌신적 노력이 컸다. 오석구는 동경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6월 청주상업학교의 교유(敎諭)로 부임했는데 국방경기가 조선중등학교에 의무적으로 실시됨을 알자 한국인의 우월성을 과시해 보자는 뜻으로 이 경기에 집중적인 노력을 시도하여 1940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자비로 일본에 건너가 이 경기의 창시자인 호까소노(外園, 陸軍中佐)를 직접 상면하여 개인교수를 받아 귀국하여 하급 학생 들 중 신체 건장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연습을 시켰던 것이다.

국방경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경기는 개인경기가 아니고 단체경기로서 한팀이 16명으로 구성돼 견인(牽引)경기, 수류탄투척, 장애물경기, 토양운반, 단체행군 등의 5개종목으로 종합성적에 따라 등급을 결정했다. 말로만 체육경기이지 다른 경기와는 달리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완전무장을 하고 뛰고 던지고 넘고 하는 것이니 연습을 연성(鍊成)이라 할 정도로 심한 신체단련수단이었던 것이다. 토양운반경기는 무장을 하고 8관(貫)의 모래를 넣은 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100m씩 계주하는 것이며, 행군은 완전무장을 한 16명 전원이 4㎞를 달려야 하는 경기였다.

1940년 9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실시된 제16회 조선신궁봉찬대회에서 한국 최초의 국방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처음 출전한 청주상업학교는 8개팀 중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해 전국규모의 체육경기에서 충북도대표가 우승한 첫 기록을 세웠다.

당시 국방경기대회에 참가했었던 청주상업학교 국방경기팀의 선수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원근(金元根)[1886~1965](대장), 김승시, 윤영훈, 박병해, 김종각, 윤관, 이언우, 김지배, 권영배, 정만기 외 6명이었다. 청주상업학교 국방경기팀은 제1회 서울대회에서 우승을 거두고 개선한 뒤 계속된 훈련 뒤에 1940년 11월 명치신궁(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제11회 대회에 출전했다. 36개 팀이 참가한 행군대회에서 신기록수립으로 1위로 골인했지만 종합성적은 상위에 들지 못했다. 이때 선수명단은 서울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었다.

1942년 대회에서 청주상업학교 국방경기팀이 1위로 동경대회에 출전해 역시 행군경기 1위 등 종합 3위를 차지했으며 1943년 대회에서도 전국 우승을 했으나 동경대회 중지로 일본에서 개최되는 대회는 출전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당시 이 경기를 보급 발전시키려고 하였던 일제의 저의가 무엇이었고 우리민족에게 무엇이 유익했는가의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젊은 학도의 기백과 민족혼으로 무장된 청주지역 학생들 특히 청주상업학교와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일본의 젊은이들과 겨뤄 연승연패(連勝連覇)했음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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