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149
한자 淸州牧-高麗-
영어음역 Cheongju-mo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이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983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983년

[정의]

고려시대의 지방행정제도.

[개설]

성종 대의 12목, 현종 대~고려 말까지 8목 중의 하나이다.

[제정경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였으나 국초에는 지방세력이 강대했던 반면 중앙 행정력이 극도로 미약했기 때문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고, 중앙에서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태조(太祖)는 지방세력이 강한 지역에 대한 조치로 주·부·군·현의 칭호를 고치고, 적극적으로 군·현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태조 대에는 아직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지방을 지배한 지방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하기는 어려웠다. 그 뒤 혜종·정종 대에는 지방에 대한 정책을 강구할 겨를이 없었으나, 광종 대에 들어와서 안정된 왕권을 기반으로 지방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광종(光宗)[946~975]은 지방 주·현에서 바치는 세공 액수를 정하고, 이때 이를 관장하는 관원으로 금유(今有), 조장(租藏)을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방에 상주하는 외관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지방에 파견되어 부과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임시직이었다.

그리고 금유, 조장의 직임을 담당해 왔던 사람들은 대체로 태조 때의 공훈세력들로서 이들의 임무는 유민의 안집과 조세·부역의 독촉·감독 및 각 지방 촌락의 전정(田丁)·호구·사원전 등을 심사 또 향호의 감시 등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성종 초에 이르러 향호들이 매양 공무를 가탁하고 백성을 침해·폭압하므로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외관의 설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 금유·조장이 그동안 자기의 직임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광종이 즉위하면서 주현 세공액을 정한 것을 기점으로 금유, 조장과 전운사(轉運使)를 설치하여 지방의 조부(租賦)를 징수 보관하고 전운하게 함으로써 지방세력에 의해 지배되던 지방에 중앙 세력이 침투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 위에 광종 대의 노비안검법의 시행은 귀족 관인층 내부에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여 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이 12목의 설치 및 외관의 파견을 하게 된 원인이라 하겠다.

[청주목 주·군·현]

청주목은 양광도에 소속되어 있으며, 청주목의 속군(屬郡)으로는 연산(燕山)[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목주(木州)[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의 2군과 속현(屬縣)으로 진주(鎭州)[충청북도 진천군], 전의(全義)[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청천(淸川)[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도안(道安)[충청북도 괴산군 도안면], 청당(靑塘)[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 연기(燕岐)[충청남도 연기군], 회인(懷仁)[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의 7개 현이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지사부(知事府) 1개(공주), 지사군(知事郡) 2개(홍주, 천안), 현령(縣令) 2개(가림, 부성)를 관할하였다. 또한 이 청주목을 관장하기 위해 파견된 관원으로는 계수관이라 불리는 목사(牧使)와 부사(副使), 判官(판관), 장서기(掌書記), 법조(法曹) 그리고 의사(醫師)와 문사(文師)가 있었다.

먼저 청주목의 속군을 살펴보면, 연산군(燕山郡)은 원래 백제 때 일모산군(一牟山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명칭인 연산이라 고쳤다. 고려에 들어와서 청주목(淸州牧)에 소속시켰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259년(고종 46)에 위사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문의현(文義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을 두었으며, 충렬왕 때에 가림현(嘉林縣)에 병합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복구하였다.

목주(木州)는 원래 백제 때 대목악군(大木嶽郡)으로 신라 경덕왕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 들어와서 지금의 명칭인 목주로 고치고, 청주목에 소속시켰다. 1172년에 감무를 두었는데, 신정(新定)[성종(成宗)이 정한 명칭]이라고 불렀다.

청주목의 속현을 살펴보면, 진주(鎭州)는 원래 고구려 때 금물노군(今勿奴郡:만노군(萬弩郡), 수지(首知),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흑양군(黑壤郡:일명 황양(黃壤)이라고 고치고 고려 초에 강주(降州)라고 칭하다가 후에 지금의 진주로 고쳤다.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하였으며, 1018년(현종 9)에 청주목에 소속시켰다.

1259년에 임연(林衍)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을 두었는데, 1269년(원종 10)에 임연과의 관계로 지의녕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시켰다가 임연이 사형을 당하자 도로 낮추어서 지금 명칭인 진주로 칭하고 감무를 두었다.

전의현(全義縣)은 원래 백제 때 구지현(仇知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금지(金地)라 고치고, 대록군(大麓郡)의 관할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 들어와서 지금 명칭인 전의로 고치고 본 청주목에 소속시켰다.

청천현(淸川縣)은 옛날에는 살매현(薩買縣)으로 상주에 속하였다가 고려에 들어와서 지금 명칭인 청천으로 고치고 본 청주목에 소속되었다.

도안현(道安縣)은 원래 고구려 때 도서현(道西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도서(都西)라고 고쳐서 흑양군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인 도안으로 고쳤으며, 1018년에 본 청주목에 소속시켰다.

청당현(淸塘縣)은 원래 청연현(靑淵縣)인데, 고려 초에 지금 명칭인 청당으로 고쳐 본 청주목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감무를 두어 도안현(道安縣)을 겸임케 하였다.

연기현(燕岐縣)은 원래 백제 때 두잉지현(豆仍只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인 연기로 고쳐서 연산군의 관할 현으로 하였다. 1018년에 본 청주목에 소속시켰으며, 1172년에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목천(木川)감무로 하여금 겸임케 하였다.

회인현(懷仁縣)은 원래 백제 때 미곡현(未谷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매곡(昧谷)으로 고쳐서 연산군의 관할 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인 회인으로 고쳤으며, 1018년에 청주목에 소속시켰다. 후에 회덕(懷德)감무로 하여금 겸임케 하였다가, 1383(우왕 9)에 별도로 감무를 두었다.

[청주목내의 향·소·부곡]

고려에서는 일반 군현의 하부구조로서 특수행정조직인 향·소·부곡이 있었다. 그런데 향(鄕)과 부곡(部曲)은 신라가 주·군을 세울 때부터 성립되었는데, 전정이나 호구가 하나의 독립고을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되어 그 소재 읍에 각각 소속되었고, 생산활동은 농업을 주로 하였다. 또한 향·부곡민은 일반 농민과 같이 조세와 공물 그리고 역(役)을 부담하였던 양인신분이었다.

소(所)는 고려에 들어와서 성립된 것으로 광산물, 해산물 및 특수한 수공업 생산물을 생산하는 곳이다. 그런데 여러 소에는 그곳의 토성리민(土姓吏民)이 있었으며, 소의 생산물은 고려의 공부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고, 그로 인해 소민의 부담은 주현민들보다 더 과중했다.

이러한 향·소·부곡이 청주목에도 있었는데, 청주목이 관할하는 향에는 주안향(周岸鄕)과 덕평향(德平鄕)이 있었다. 주안향은 옛날에는 주애(朱崖)라고 했는데, 청천현의 동남쪽 60리에 있는데, 문의, 회인 두 현을 지나서 있으며, 덕평향은 전의현에서 서쪽을 지나서 있다. 소는 배음소(背陰所)(일명 背陰), 楸子所(일명 椒子), 新銀所 등이 있으며, 부곡에는 오은부곡(吳銀部曲)[청주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음], 석곡부곡(錫谷部曲)[청주 서남 25리에 있음], 조풍부곡(調豊部曲)[청안현을 지나서 있음], 한신부곡(閒身部曲)[모두 청천현에 있음] 등이 있다.

청주목의 속현에도 향·소·부곡이 존재하였는데, 문의현에는 자인부곡(慈仁部曲)이 현에서 20리 되는 곳에 있었다. 청당현에는 곡은곡소(谷銀谷所), 염곡소(念谷所) 유통소(游筒所)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청당현에 있으며, 완곡소(薍谷所)는 현에서 동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리고 도안현에는 정안부곡(靜安部曲)이 있었다. 진천현에는 김천향(金泉鄕)이 현에서 북으로 39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협탄소(脇呑所)는 현에서 서쪽으로 36리 떨어진 곳에, 향림부곡(香林部曲)은 현에서 북쪽으로 23리 떨어진 곳에 있다.

[청주목의 군사조직]

청주목에 조직되어 있는 군사조직은 주현군이다. 주현군은 947년(정종 2)에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광군을 개편한 것이다. 광군은 조직될 당시 병력이 30만 명이었으며, 현종 초 경북 예천에 있는 개심사(開心寺)의 석탑을 쌓는 데에 광군이 동원된 사실을 보아 광군은 지방군으로서 농민으로 구성된 농민군이었다. 이러한 광군은 현종 대에 지방제도의 정비와 동시에 주현군으로 개편·정비되었다.

이 주현군은 보승군(保勝軍), 정용군(精勇軍), 1품군(一品軍)과 촌에 머무는 2품군·3품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현군의 보승군과 정용군은 전투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술과 훈련 등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그에 소용되는 무기는 물론 식량과 피복 등을 스스로 마련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원래 그들이 소유한 토지를 지급형식을 빌어 그들이 지는 역의 대가로 하여 이들에 대한 조세 또는 일반의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러므로 주현군 소속의 보승군과 정용군은 원칙적으로 자영농민들로써 구성된 병농일치의 군인이었던 것이다. 이 주현군의 군직으로는 중랑장(정5품), 랑장(정6품), 별장(정7품), 교위(정9품) 대정 등이며, 군호는 정용, 좌우군, 마대(馬隊), 노대(弩隊), 신기(神騎), 보반(步班) 등으로 나누어 불리웠다.

반면 일품군은 중앙의 명령에 의해 동원되는 노동부대였으며, 여기에 소속된 군인들도 지방의 농민들이었으며, 지휘관도 향리가 겸임하였다. 청주목의 주현군은 보승군이 538명, 정용군이 708명, 1품군이 850명으로 총 2096명이 조직되어 있었다.

[후백제와 고려의 청주다툼]

청주는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에게는 남쪽 진출로이며, 후백제는 북진로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청주는 후백제와 고려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즉 925년(고려 태조 8) 11월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검필(庾黔弼)을 보내 후백제의 연산진(현 문의)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장수인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 다시 임존군(任存郡)[현 대흥]을 공략하여 3천 여명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후 태조는 청주를 근거지로 하여 후백제를 공략하였는데, 928년 7월에는 친히 태조가 후백제의 삼년산성(三年山城)[현 충청북도 보은]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청주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청주가 후백제 공략의 고려 전진기지가 되니, 후백제는 청주를 빼앗기 위해 장군 김훤(金萱), 애식(哀式), 한장(漢丈) 등에게 3천여 명의 군사를 주어 청주를 공략하였다. 이때 유검필은 왕의 명령으로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고 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하루는 탕정군 남산(南山)에 올라가 앉아서 졸고 있을 때 꿈에 한 대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청주]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터이니 빨리 가서 구하라”고 하였다. 유검필이 놀라 깨어 그 길로 청주로 가서 적군을 맞아 싸워 물리치고,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하여 3백여 명을 죽였다.

[외적의 침입과 청주]

고려는 전 시기를 걸쳐 크고 작은 외침을 많이 겪었다. 특히 고려 후기는 몽고와 왜구 그리고 홍건적의 침구(侵寇)로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당시 청주도 이들의 침입으로 인해 유린당하여 피해를 입기도 하고, 적과 대적하여 싸우기도 하였다.

즉 1231년(고종 18)에 몽고가 침범하였을 때 몽고의 살례탑(撒禮塔)의 군대가 안북부(安北府)에 본영을 두고 그 군대를 남아 시켜 개성을 위협하고, 그 별동부대는 다시 남으로 향하니, 청주는 양주, 광주, 충주 등과 함께 몽고군에 의해 유린당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왕족 회안공(淮安公) 정(挺)을 안북부에 보내어 살례탑과 강화를 하였으나, 지나친 요구로 고종(高宗)은 몽고와의 싸움을 결심하고 수도를 강화로 천도하고, 각도의 백성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하도록 하고 몽고에 맞섰다. 그 와중에 청주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 청주 백성들을 섬을 옮기게 하였다.

또 1290년(충렬왕 16) 5월에는 원의 함단(唅丹)이 고려 동북계를 넘어 침략하고,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1291년 3월에는 개경에 침투하였으나, 고려 대장군 송화(宋華)의 부대와 교전한 끝에 다수의 병사를 잃었다. 또한 원주 방면으로부터 충청북도에 침입한 함단적은 충주산성 부근의 전투에서 충주산성별감이 거느리는 고려군에게 격파되어 4·5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때 고려 측에서는 적의 주력부대를 청주 경계인 조치원 방면으로 유인하여 려·원 연합군이 합동공격을 계획하고 중익만호(中翼萬戶) 인후(印候), 좌익만호(左翼萬戶) 한희유(韓希愈), 우익만호(右翼萬戶) 김흔(金忻) 등이 거느리는 고려의 3군은 원의 원군과 연합하여 충청남도북 접경지대인 연기현의 남쪽 정좌산(병마산성) 아래에서 총공격을 가하여 적군을 완전 섬멸하였다.

그리고 왜구의 침구가 14세기 후반인 충정왕 때부터 심하더니 공민왕(恭愍王) 이후에는 더욱 극성을 부리고 침략지역도 해안지역은 물론 삼남의 각도뿐만 아니라 일부 중부지방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공민왕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충청도 각주군의 약탈은 40여 회가 넘었으니 이곳 백성의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청주도 1371년 6월에 왜구가 침범하였는데, 그 기세가 심하니 아군이 풍문만 듣고 도망하자 왜적이 사방으로 나와 공격하므로 아군이 다시 틈을 타서 이를 공격하여 왜적 10여명을 죽이기도 하였다. 또 1387년 8월에도 왜적이 청주·유성·진잠·옥천·황간·영동 등지에 침범하였는데, 이때는 고려사회가 문란하여 화척(禾尺)·재인(才人)들이 작당하여 유랑하고 왜구를 사칭하여 주·현을 마음대로 약탈하기도 하였다.

또한 1359년(공민왕 8)부터 홍건적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자주 침범하여 1361년에는 10여만의 무리가 얼어붙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침입하여 왔다. 이때 상원수(上元帥) 안우(安祐), 도병마사(都兵馬使) 김득배(金得培) 등이 적을 쳤으나, 적의 기세가 커서 개성이 함락되니, 공민왕은 남쪽으로 파천하여 복주(福州)[안동]로 옮기었다.

그 뒤 개경을 수복하여 환도하는데, 감찰사가 청주는 이미 순행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삼도가 만나는 곳이라 양곡의 운반이 편리하고 적이 능히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니 청주에서 수레를 멈추어 두었다가 서서히 농사의 틈을 기다려 서울 가까운 땅을 골라 옮길 곳을 찾으소서라고 간언을 하니, 이 의견을 받아들여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7개월을 청주에서 머물기도 했다.

[변천]

청주는 본래 백제의 상당(上黨)으로, 고구려에 소속되었을 때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서원(西原)으로 불렀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태조 23년 (940)에 여러 주와 부·군·현의 이름을 고치면서, 청주로 고쳐서 부르게 했다. 그 후 983년(성종 2)에 개주(開州)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치고, 국내를 12주로 나누어 그곳에 목(牧)을 두었는데, 청주도 12목의 하나가 되었다.

다시 995년에 행정구역을 10도로 나누었는데, 청주와 충주에 소속된 주·현을 중원도에 속하게 하고, 12주에 각기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는데, 청주도 절도사가 배치되면서 전절군(全節軍)이라 부르며, 중원도(中原道)에 소속되었다.

현종 대 다시 외관의 제도를 개정하였는데, 1012년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都護), 75안무사(按撫使)로 변경하니, 청주도 이에 따라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안무사를 폐지하고, 국내를 다시 5도와 양계로 나누어 4도호부, 8목, 15부, 129군, 335현, 29진을 이에 분속을 시키니, 청주는 8목 중의 하나로 양광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청주는 고려 말까지 8목의 하나로서 존속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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