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934
한자 墳墓
영어음역 bunmyo
영어의미역 grav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차용걸

[정의]

사체나 유골을 처리하는 장소 즉, 무덤.

[개설]

분묘란 흔히 묘 또는 무덤이라도 하고 사체나 유골을 처리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나 시설로 역사적으로 오래된 무덤을 고분이라 한다. 분묘는 각 사회의 장제(葬制)나 또는 내세관과 깊이 관련되어있다.

또 자연환경이나 생업형태, 피매장자의 연령과 성별,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이르기까지 분묘의 형태와 습속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무덤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매장시설은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이때부터 인류는 막연하게나마 내세에 관한 관념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며 청동기시대 이후로 무덤형식이 다양해지고 역사시대에는 각지에 고분군이 남아있다.

[변천]

우리나라의 분묘 형태는 선사시대 것으로 돌무지무덤, 돌널무덤, 돌곽무덤, 고인돌, 독무덤, 나무곽무덤(토광목곽묘) 등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널무덤·돌널무덤·돌무지무덤 등이 주로 쓰였는데, 고구려는 재래의 돌무지무덤이었으나 4세기경부터 중국의 영향으로 돌방무덤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돌방무덤은 백제·신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왕릉처럼 석돌을 갖춘 돌방무덤이 유행하였으며 이러한 방형돌방무덤은 일반 귀족묘에도 채용되었다. 또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아 봉토주위에 판석을 돌려 방형 봉토를 만든 예가 있고, 화장도 유행하여 재를 판석으로 짠 상자형 돌널에 지석과 함께 격납, 매장되었고 돌널 네 벽에는 사신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고려의 돌방무덤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상류계급 사람들은 널을 석재덧널(石棺:석관)에 넣거나 석회와 모래를 섞어 두껍게 감싼 회곽으로 보호하고 인형이나 그릇 등 명기(明器)를 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봉토주위의 십이지석은 왕릉에 한하였지만 석인은 일반 양반들도 세울 수 있었다.

[청주의 분묘 현황]

청주지역에서는 송절동의 원삼국시대의 고분군과 신봉동에서 삼국시대 고분군이 각각 발굴되었다. 그 결과 청주지역에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에 걸쳐 상당한 세력의 정치집단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 유적의 규모나 출토유물은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의 그것에 견줄만한 방대함과 화려함은 없다.

그러나 송절동유적의 경우 아직 삼국의 화려한 문화가 완성되기 이전의 시기에 해당하고, 신봉동유적의 경우 문물이 집중되는 도읍지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곳의 유물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삼국의 도읍지를 제외한 어느 곳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으며 고분군의 규모도 대형에 속하고 무덤의 형태에서도 다양한 구성을 보인다.

따라서 이들 두 유적은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를 다루는 고고학과 문헌사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삼국시대 이후의 고분으로는 고려시대의 석곽묘와 토광묘가 송절동신봉동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후대 고분이 발견된 수효는 매우 적지만 이러한 희소성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청주읍지(淸州邑誌)』에 기록되어 있는 총묘(塚墓)로 수의동 강촌리 뒷산인 묵방산의 중턱에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동래부사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묘소가 있는데, 묘역은 약 200평정도로 상석·문인석·망주석·자명등·묘표 등이 있으며, 신도비와 더불어 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어있다.

또 고려 후기의 문신인 연담공 곽예(郭預)[1232~1286]의 묘소가 상당구 명암동 명암 약수터 뒷산에 있다. 연담공의 묘소는 원래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는데, 1975년 국토개발지구로 지정되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수의동 도장골마을의 왼쪽 청룡산 중턱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운 박우현(朴友賢)의 묘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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