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265
한자 烽火山
영어음역 Bonghwasan Mountain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지명/자연 지명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높이 433m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 있는 산.

[개설]

봉화산것대산(484.0m) 봉수(烽燧)가 있던 산이며 높이는 약 433m이다. 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산107-2번지에 해당한다. 봉화를 올리던 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칭유래]

북쪽의 진천현 소을산(所乙山) 봉수, 그리고 남쪽의 문의현 소이산(所伊山) 봉수와 연결된다. 봉화산 것대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봉수대(봉화둑)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영남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여러 읍을 점령하고 북상하여 청주 인근의 상당성을 점령하였다. 지략이 출중한 이인좌는 성을 점령하자 먼저 봉수대를 지키는 군졸들을 처치하여 반란이 서울에 전해지지 않도록 선수를 쳤다. 그리하여 봉수대의 신호가 보내지지 않게 되자 서울에서는 그의 모반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때 이 산 중턱에서 봉화둑지기를 하는 목노인이 선이라는 딸 하나를 데리고 나라에서 주는 급미(給米)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이인좌는 군사들을 보내서 그들을 모두 처치해 버리도록 하였다. 당시 목노인의 딸 선이는 같은 마을에 사는 백룡이라는 총각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날 백룡이는 청주 고을로 자리를 팔러 갔을 때였다.

군사들이 들이닥쳐서 목노인을 불러내 그 자리에서 참살해 버렸다. 마침 선이는 백룡이를 마중 나가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아버지의 비명 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와 보니 부친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으므로, 그날 군사들의 이상한 행동으로 보아 곧 급변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봉화둑으로 올라가서 봉화대에 불을 당기려는 순간 뒤를 쫓아온 군사들에 의하여 선이도 참살되고 말았다.

한편 청주에서 돌아온 백룡은 목노인이 죽고 선이가 보이지 않으므로 광에 있던 쇠스랑을 집어들고 급히 봉화둑으로 올라갔다. 그 봉화둑에 올라가보니 선이는 죽어있고 군사들이 멀리 돌아가는 모습이 보이므로 급히 뒤를 추격하여 몰래 기습하였다. 그들을 처치한 백룡은 목노인과 사랑하던 연인이었던 선이를 옥양목으로 싸서 타오르는 봉화불 속에 화장하고 눈물을 뿌리며 봉화둑을 떠났다.

진천 소을산에서 것대산(484.0m)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보고 그대로 안성으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전달되기 시작한 봉화불은 서울 목멱산(남산) 제5지에 전해짐으로써 조정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이 이인좌의 난을 토평하게 된 것은 이 것대산(484.0m) 봉화둑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1995년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바 있다.

[위치와 교통]

것대는 상당산성 밖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이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이 것대산(484.0m)이다. 것대산(484.0m)에는 것대에서 명암동 중봉재로 넘어가는 것대고개가 있으며, 상봉재라고도 한다. 청주에서 가장 높은 고개이다. 이 상봉재 아래쪽에는 상봉소류지(小流池)가 있다.

산성고개를 넘자마자 좁은 차길로 우회전하면 좁은 골짜기가 나타나며, 골짜기를 따라 5분정도 차를 타고 가면 상봉소류지에 도착할 수 있다. 소류지 바로 위에는 봉화산(것대산(484.0m)) 봉화터가 있으며, 봉화터 바로 옆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소가 있어 그곳까지 승용차가 다닐 수 있도록 좁은 도로가 나 있다.

[현황]

산성고개를 넘자마자 상봉소류지에서 내려오는 골짜기를 가로막아 식당건물(가또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으며, 소류지 바로 위에는 봉화산(것대산(484.0m)) 봉화터가 있다. 봉화터 바로 옆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소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명암동 김수녕양궁장 뒤쪽으로 등산로가 있으며, 상당산성 쪽으로 등산로를 따라가면 봉화산에 이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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