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226
한자 朴之-
영어음역 Park Jih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본관 순천(順天)
출신지 청주

[정의]

조선 후기의 충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임진 의병장 박춘무(朴春茂)[1544~1611]의 5대손이며, 병자호란 때 순절한 박동명(朴東命)[1576~1636]의 현손으로 삼대 창의(倡義)의 충절을 자랑한다.

[활동사항]

어릴 때 『삼국지(三國志)』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를 외우고 감상하길 즐겼다.

1727년(영조 3)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廬幕)에서 생활하던 중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대한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국가가 불행하여 적도가 창궐하니 비록 상중이나 지금 나서서 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선조(先祖)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국은에 보답하는 길도 아니라”라며 곡을 하면서 분연히 일어나 격문을 돌려 창의하였다.

이계완(李繼完), 유사묵(柳師黙) 등 100여명과 그의 아들 박용한(朴龍漢)·박광한(朴光漢)을 선봉, 종제(從弟)인 박지채(朴之彩)·박지난(朴之蘭)을 후대(後隊), 유시묵(柳時黙)·남천중(南天重)을 종사관으로 각각 삼아 청주성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 때 이미 남문 밖에 진을 쳤던 족숙(族叔) 박민웅(朴敏雄)과 함께 연합하여 수문(守門)의 적장들 목을 베고 병영으로 쳐들어가 반역도들을 섬멸하였다. 이후 다시 여막에 돌아왔다.

1728년 호서좌도소모사(湖西左道召募使) 유숭(兪崇)이 장계에 의해 포상되었다. 난을 평정한 공으로 녹훈(錄勳) 1등에 올랐다.

이인좌의 난 이후 꽃과 대를 심고 가꾸어 지기(志氣)를 양성하면서 살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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