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104
한자 羅萬葉
영어음역 Na Manyeop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611년연표보기
몰년 1679년연표보기
본관 안정(安定)
무숙(茂叔)
아버지 나인(羅紉)
어머니 조찬(趙璨)의 딸 임천(林川)조씨
나만기(羅萬紀)|나만원(羅萬元)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 안정(安定)이며, 자는 무숙(茂叔)이다. 아버지는 나인(羅紉)이고, 어머니는 조찬(趙璨)의 딸 임천(林川)조씨이다. 할아버지는 나윤충(羅允忠)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나빈(羅濱)이며, 문과에 합격하여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낸 나만기(羅萬紀)와 나만원(羅萬元)의 동생이다. 부인은 민건(閔楗)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활동사항]

1653년(효종 4) 계사년 문과(文科)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되어 괴원(槐院)[승문원의 별칭]의 참하(參下)에 뽑혔으나 가문의 흠이 있는 사람을 청로(淸路)에 내보낼 수 없다는 심유행(沈儒行)의 탄핵으로 승문원 관리로 나가지 못했다.

가문의 흠이란 그의 형 나만기광해군(光海君) 당시 성균관 유생들을 이끄는 색장(色掌)으로서 팔도에 통문(通文)을 돌려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열 가지 죄를 일일이 들었던 사건을 말한다.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후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661년(현종 2)에는 남원부사로 파견되어 목민관으로서의 임무를 다했고,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복귀하여 대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이어 여주목사(驪州牧使)로 근무할 당시 그의 형 나만원의 아들 나성도(羅星度)가 호서의 유생(儒生)으로 더불어 고묘(告廟)하기를 소청(疏請)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원만히 처리해 달라는 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 후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폐조(廢朝) 때의 흉인(凶人)으로 몰린 나만기 등을 유적(儒籍)에 다시 기록한 사건이 일어나 호서사림의 물의가 일기도 했다. 향년 68세 일기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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