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인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060
한자 近代人物
영어음역 geundae inmul
영어의미역 People of Cheongju in Modern Time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양수

[정의]

일제강점기 이후 독립운동, 교육계, 국방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회에 기여한 청주의 인물.

[개설]

충청지역의 근대 인물들은 외세에 의한 개항 후에 침략해 오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대항하여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나라 안과 밖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한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의병장들이 많이 나왔다. 그리고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도 겨레의 주권을 회복하고, 광복 후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기둥이 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사업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편, 한국동란 때는 국방력이 부족한 가운데도 지형을 이용하고, 지략을 동원하여 북한군을 저지하고, 반격에 큰 전공을 세운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독립운동가]

일제하에서 독립에 공헌한 분으로 신규식(申圭植)[1879~1922], 신채호(申采浩)[1880~1936], 신건식(申健植)[1885~1963], 신백우(申伯雨)[1886~1959], 손병희(孫秉熙)[1861~1922], 이광[1949년 1월~1951년 7월] 등이 있다.

신규식은 을사늑약이 1905년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실패하여,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임시정부가 1919년에 수립되자 의정원(議政院) 부의장에 선출되고, 법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었다.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고령신씨(高靈申氏) 가문 가운데 청주군 출신들은 일제 때에 대표적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이밖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신채호는 한말의 사학자요,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였다. 1905년에는 고향인 낭성면에 신규식이 설립한 문동학원(文東學院)의 강사도 하였고 1907년에는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3년에는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해로 가서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기구에 참여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국외에 있던 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신건식도 동제사에 참여하고 광복군과 임정에서 활동하였다. 신백우도 1907년 신민회, 청년학우회 등에 가입하고, 만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에서 활약하였다.

손병희는 동학의 제3세교주이며 천도교의 창시자로서, 3·1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의 옥고를 치루고 병보석으로 출감후 서거하였다.

이광은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1910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시영(李始榮)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원이 되었다. 1921년 임시정부 외무부의 베이징 주재 외무위원이 되어 한중 사이의 외교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그 후 난징에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고, 1938년 임시정부의 후난성 외교연락대표로 일하였다.

[의병장]

구한말의 의병장에는 한봉수(韓鳳洙)[1883~1972], 한춘(韓春), 신황(申潢) 등이 있다. 한봉수는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1907년에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모아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겨 무적장군(無敵將軍)으로 명성을 날렸다. 한춘은 1907년 군대해산 후에 한봉수와 함께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한봉수 의병장의 부관으로 활약하였다. 신황은 청주 출신으로, 1905년 서울에서 동우회에 참가하여 이동녕과 함께 이완용의 집을 습격하였고,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교육가]

교육사업을 일으킨 분으로 김원근(金元根)[1886~1965], 김태희(金泰熙)[1881~1937], 강기용(康基用)[1917~1978] 등이 있다. 김원근은 조치원에서 1904년부터 무역상을 경영하면서 모은 돈으로, 한말의 외세에 대한 충격을 교육으로써 지혜를 계발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자는 신념을 갖고 일생동안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연청학원을 1908년 설립하고, 대성보통학교를 1924년에, 청주상업학교를 1935년에 설립하였다. 광복이후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대학으로 청주상과대학을 1945년에 설립하고 국민일보 사장이 되었다. 1960년에는 대성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고, 1965년에는 대성초등학교를 부활시켜 신설하였다.

김태희는 교육사업과 청년운동을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해 임시정부 연통제의 충청북도 참사를 1920년부터 맡아,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문서의 배포 등 국내 독립운동의 공작 책임을 담당하였다. 강기용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은 후,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교육입국이 절실함을 깨닫고 창학(創學)의 뜻을 세워 1954년 운호학원을 설립하고, 운호학원내에 지금의 서원대학교 등 지방 굴지의 사학으로 성장시켰다.

[한국동란 때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한 장군]

김종오(金鍾五)[1921~1966]는 한국동란 때, 제6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춘천·홍천 방면으로 공격해오는 북한 공산군의 진격을 5일간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공산군의 남한 진공계획을 저지하였다.

충청북도 음성에서는 북한공산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하여 사살 1,000명, 포로 97명과 수많은 장비를 노획하는 등,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리고, 같은 해 9월 낙동강방어선 신녕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어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한·만 국경에 최초로 태극기를 꽂았다. 북진작전 중 부상으로 제9사단장으로 전보된 다음, 육군본부 인사국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거쳐 제15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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