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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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侵入 |
영어공식명칭 | Invasion by Japanese pirates |
이칭/별칭 | 일본인 해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전개 시기/일시 | 1376년 - 왜구 침입 전주와 주변 지역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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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378년 - 왜구 침입 전주와 주변 지역 침입 |
전개 시기/일시 | 1380년 - 왜구 침입 화산면, 고산면 침입 |
발생|시작 장소 | 왜구 침입 - 전라북도 전주시 |
발생|시작 장소 | 왜구 침입 -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
발생|시작 장소 | 왜구 침입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박위 |
[정의]
고려 말기 전라북도 완주 지역에 왜구가 쳐들어와 약탈한 사건.
[역사적 배경]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인 해적을 말한다. 물론 삼국시대에도 우리나라에 일본인 해적이 침입한 적은 있지만 침입 규모나 피해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왜구하면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인 해적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기록상 왜구가 고려에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고종 10)부터이다. 이로부터 5년에 걸쳐 왜구가 7차례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 지역을 노략질했으나, 1223년 이후 100여 년 동안은 10여 차례 침입하는데 불과했다. 그 뒤 1274년(충렬왕 1)과 1281년(충렬왕 7)에 고려와 원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했다. 왜구의 노략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350년(충정왕 2)부터이다. 이때부터 공민왕대[1351~1374]까지 115회, 우왕대[1375~1388]까지는 278회의 침입이 있었다. 1389년(창왕 1)에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朴葳)가 쓰시마[대마도]를 소탕하면서 왜구의 침입은 잠잠해졌다.
[경과]
전라북도 완주 지역에 왜구가 침입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76년 9월에 흥덕현[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주변]과 고부군[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일대]에 상륙한 왜구들이 각지를 휩쓸고 전주성[전라북도 전주시]을 함락해 약탈하고, 모악산의 귀신사(歸信寺)로 물러가 머물렀다. 이때 전주목사 겸 병마사인 유영(柳濚)의 군대가 이를 치자 쫓긴 적들은 임피현을 점령해 만경강의 다리를 끊고 웅거했다. 유실(柳實)의 군대가 다리를 놓고 양광도(楊廣道) 전라도 도지휘사 겸조전원수(都指揮使拑助戰元帥)인 변안열(邊安烈)의 군대가 다리를 건너는 한편 안렴사(安廉使) 이사영(李士潁)의 군을 매복케 했으나 역습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전주가 쉽게 함락된 것은 전라도원수인 유영의 탓이었다. 따라서 유영은 금고처분을 받고 서민이 되었으며, 유실도 좌천되었다. 이때 지금 전라북도 완주 지역도 피해를 보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의 연해 지역에는 3년 또는 5년 동안씩 왜구들이 둔을 치고 있어 수로가 막혔으므로 마침내 조운(漕運)을 파하기에 이르렀다. 1378년(우왕 4) 9월 왜구가 연산[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 임주[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일대], 니산[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일대], 진동(珍同)[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일대], 익주[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일대] 등지에 침입하고, 1378년 10월에는 다시 전주에 들어와 방화하고 살육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완주 지역의 피해도 많았을 것이다. 1380년 7월에는 서주[충청남도 서천군], 부여, 유성, 운제[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일대], 고산[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일대], 금주(錦州), 옥천, 함열, 풍제를 노략질했다. 이때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지역이 왜구의 직접적인 피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