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96 |
---|---|
한자 | 金元國 |
영어공식명칭 | Kim Wonguk |
이칭/별칭 | 김창섭,석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김원국(金元國)[1870~1909]은 전라남도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석포(石浦)이며 본명은 김창섭(金昌燮)이다. 개항기 김준(金準) 의병장과 연합하여 전투 중 지휘부가 전사하자, 의진(義陳)을 정비하여 조경환(曺京煥), 전해산(全海山) 등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고, 전라남도 및 광주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활동 사항]
김원국은 1905년 9월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일본군을 타살하고 피신하였으며, 1906년 3월 동생 김원범(金元範)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 무등산에서 거병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2월에는 김준 의병진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일제는 1908년 1월 24일부터 15개 부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의병 탄압 작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김준 의병진은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카 츠사부로[吉田勝三郞] 소좌의 군사 작전에 쫓기게 되었다. 김준 의병진은 1908년 2월 2일 창평현 지곡(芝谷)을 거쳐 무동촌(茂洞村)에 거처를 정하였다. 요시다카 츠사부로 소좌는 군대를 이끌고 무동촌 마을로 진격하였다. 이에 집중 사격을 하여 요시다카 츠사부로 소좌와 부하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장성군 토천(土泉)과 영광군 낭월산(郎月山)에서 일본군을 만나 교전하였다. 1908년 3월 21일 장성군 광곡(廣谷)에서 1908년 3월 25일에는 광산군 어등산(魚等山)에서 각각 교전하였다.
1908년 4월 25일 김준이 순국하자 김원국은 다시 독자적 의진을 이끌고 나와 재편하였다. 1908년 6월 18일경 조정인(趙正仁)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7월 전해산 의병장과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조직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9월 전라남도 광주 선암시장에서 동생인 김원범이 도포장(都砲將)으로 활동한 조경환의 의병부대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1909년 1월 중순까지 전라남도 광주를 중심으로 영광, 함평, 장성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나, 조경환이 순국하고 동생 김원범도 전사하였다.
김원국은 1909년 2월 19일 조직을 개편하여 자신이 대장이 되고, 선봉장에 곽진일(郭鎭一), 중군장에 오덕신(吳德信), 후군장에 김재연(金在淵), 도포장에 이교학(李敎學), 호군장에 조찬성(趙贊成)을 임명하였다. 1909년 2월 하순 김원국은 의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나주군 송치(松峙)에서, 1909년 3월에는 장성군 남일면에서, 1909년 4월 2일 곡성군 오산면에서, 1909년 5월 19일에는 불갑산(佛甲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원국은 전투 중 부상으로 곽진일에게 부대를 위임하였다.
1909년 6월 10일 전라남도 광주군 우산면 본촌에서 은신하던 중 광주순사대에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일 광주감옥으로 이송 중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하여 함평 먹굴산에 잠시 피신하였으나, 1909년 12월 5일 영광 불갑산으로 이동 중 일제에 체포되었다. 김원국은 광주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총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장을 2013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