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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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晋慶 |
영어음역 | Bak Jingyeong |
이칭/별칭 | 명술(明述),와유당(臥遊堂),소암(巢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 고리실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조선 시대 구미 출신의 유생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술(明述), 호는 와유당(臥遊堂)·소암(巢巖). 용암(龍巖) 박운(朴雲)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건재(健齋) 박수일(朴遂一)이며 어머니는 평양조씨(平壤趙氏) 인의(引儀) 조인복(趙仁復)의 딸이며, 장인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다.
[활동사항]
박진경은 1596년(선조 29) 16세에 장인 장현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중이라 백성이 모두 기근으로 유랑민이 되었으나 솔잎을 씹으면서 오직 독서에만 열중하였으며 아버지가 왜군에게 피살되자 병화를 무릅쓰고 시신을 찾아 장사지냈다고 한다. 1634년(인조 12) 영숭전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최명길(崔鳴吉)이 한 번 만나고자 했으나 거절하였다.
1636년(인조 14) 봄에 나라에서 충의사(忠義士)를 뽑아서 모병하자 향리의 추천에 의하여 모집에 응했다. 같은 해 겨울 청군이 쳐들어오자 최현(崔晛), 돈봉(遯峯) 김녕(金寧), 욕담(浴潭) 김공(金羾), 양탄(陽灘) 김양(金瀁), 탄옹(灘翁) 김경(金澃) 등과 더불어 의병장이 되어 ‘나라가 위태로울 때 힘껏 싸우다 죽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 이제 보람 있게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 사방에 격문(檄文)을 띄워 의병을 일으켰다.
본부의 도대장(都大將) 전식(全湜)이 성주·대구·예천의 군병을 더 거느리고 북상하라고 지시하자, 박진경은 먼저 의병을 이끌고 현재의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적암리에 가서 세 고을의 군대를 기다렸지만 인조의 항복 소식이 전해져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후 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세자시부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 아래서 여생을 마쳤다. 산수를 좋아하여 여러 폭의 산수화와 지도 등을 벽에 걸어두고 즐겼다 한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 『해동명현록(海東名賢錄)』과 『상례휘보(喪禮彙補)』가 있다.
[상훈과 추모]
대구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