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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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澃 |
영어음역 | Gim Gyeong |
이칭/별칭 | 정여,탄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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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
성별 | 남 |
생년 | 1581년 |
몰년 | 1637년 |
본관 | 선산 |
대표관직 | 호조좌랑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선산. 자는 정여(靜如), 호는 탄옹(灘翁). 증조할아버지는 김취기(金就器)이고, 아버지는 김석지(金錫祉)이다.
[활동사항]
김경은 11살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금오산 도선굴(道詵窟)로 피난하였는데, 할아버지와 부모가 역질(疫疾)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어렸으나 전쟁의 와중에도 관(棺)을 마련하여 세 분의 장례를 치렀다. 장성해서는 의표(儀表)가 크고 쾌활한 기질에 도량이 넓었으며,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칭찬이 자자하였다. 여헌 장현광과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671년(광해군 9)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1629년(인조 7)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의병을 일으켰는데, 조정에서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의금부도사에 제수하였는데, 나중에 역적 이인거(李仁居)를 잡아들이는 공훈을 세웠다. 또한 역적 유효립(柳孝立)을 잡아들이는 공훈을 세웠으며, 교하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1637년(인조 15)에 함흥판관·호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같은 해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호조참판을 증직되었으며, 지역의 사림들이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