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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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晛 |
영어음역 | Choe Hyeon |
이칭/별칭 | 계승(季昇),인재(訒齋),정간(定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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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해평면 해평리 |
성별 | 남 |
생년 | 1563년 |
몰년 | 1640년 |
본관 | 전주 |
대표관직 | 관찰사|병마절도사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訒齋). 현감 최수지(崔水智)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증좌참찬(贈左參贊) 최심(崔深)이고, 참판(參判) 최응룡(崔應龍)의 종손자이다.
[활동사항]
1563년(명종 18) 해평에서 태어났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1606년(선조 39)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고 홍문관의 고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하는 방책을 임금에게 올린 후 스스로 의병에 가담하여 왜적과 싸우기도 하였다. 한림에 있을 때 서울을 옮기자는 광해군의 주장에 적극 반대하여 그 계획을 중지시켰다.
한편 충청도 민심을 알기 위해 암행하여 불공평한 세금을 시정하기도 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왕이 “경은 지략이 뛰어나서 군무에 종사한 적이 있으니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출전하라. 그리고 이 칼을 줄 테니 부원수 이하 누구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하라”고 하였다. 출정 후 싸움을 독려하여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후에 이 전란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인 「복명장계(復命狀啓)」와 지방 관원과 군관들의 거취와 전투 행위 등을 기록한 「정장사근만행적(征壯士勤慢行蹟)」을 발표하였다. 인조는 후에 논공행상을 이 기록에 의존하였다고 한다. 벼슬은 병조참의(兵曹參議)·형조참의(刑曹參議)·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 및 대사간(大司諫)에 이르고, 64세에 강원도관찰사·순찰사·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많은 민폐를 시정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북방의 호족(胡族)이 평산까지 쳐들어 왔을 때 직접 관군을 이끌고 북한강까지 가서 지키게 하였다. 정예 군사를 뽑아 동해안으로 보내 해변을 지키게 한 후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작성하여 각처에 발송함으로써 영서 지방 각처에서 큰 반응을 일으켜 의병이 조직되었다.
횡성현에 거주하는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죄인이 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회령으로 유배된 후 왕명으로 풀려났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조령산성까지 진격하였으나 강화 소식을 듣고 치욕을 개탄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0년(인조 18)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학문과 사상]
두곡 고응척(高應陟), 학봉 김성일(金誠一) 문하에 유학하였다. 문장과 덕망이 높아 이름을 떨쳤다.
[저술 및 작품]
『일선지(一善志)』 등 저서가 있고, 국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국한문으로 되어 있는 「용사음(龍蛇吟)」과 「명월음(明月吟)」은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용사음」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3·4조의 가사로 당시의 전황과 사회상을 묘사했으며, 「명월음」은 당시 흉흉한 민심을 풍자한 가사이다. 문집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40년 사후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874년 의정부 좌찬성 추증 시 정간(定簡) 시호를 받았다. 종조부 최응룡(崔應龍)과 함께 해평의 송산서원(松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