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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金景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830
한자 金景熹
영어음역 Gim Gyeonghui
이칭/별칭 용회(用晦),노계(蘆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창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인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성별
생년 1515년연표보기
몰년 1575년연표보기
본관 광산

[정의]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용회(用晦), 호는 노계(蘆溪). 아버지는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낸 돈목재(敦睦齋) 김기서(金麒瑞)이다.

[활동사항]

김경희(金景憙)는 1515년 지금의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호동마을에서 태어났다. 1534년(중종 29) 식년시에 생원 3등 34위로 합격하였다. 이어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김안로(金安老) 등의 농간으로 낙방하자 중종이 금장(金粧) 『두시전질(杜詩全帙)』을 하사하여 위로하였다고 한다. 외삼촌인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1488~1545]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고 시에 능하였으며, 중종 때 동국필원(東國筆苑)에 오른 명필이었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호동(虎洞) 노계(蘆溪)에 은거하였다. 1546년(명종 1) 노계 변 바위 위에 취석정(醉石亭)을 짓고 정자(鄭滋), 이만영(李萬榮), 송인수(宋麟壽), 심광언(沈光彦), 양응정(梁應鼎) 등의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하생으로는 학안지, 오익창(吳益昌) 등 백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성리설(性理說)』, 『언행록(言行錄)』 등의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노계집(蘆溪集)』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문집인 『노계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노계김선생유고(蘆溪金先生遺稿)』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고창군 고수면[옛 고사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에 있는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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