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194 |
---|---|
한자 | 蘆山祠 |
영어음역 | Nosansa |
영어의미역 | Nosan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산 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성격 | 사당 |
---|---|
양식 | 맞배지붕 |
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산 9 |
소유자 | 광산김씨 문중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에 있는 김연, 김석원, 김기서, 김경희, 심진을 기리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노산사는 1826년(순조 26)에 고려 후기 명신인 김연(金璉)을 주벽으로, 김석원(金錫元), 김기서(金麒瑞), 김경희(金景熹), 심진(沈搢) 등 5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주벽인 김연은 광산김씨 양간공파(良簡公派) 파조로, 1215년(고종 2)에 개경 동부에서 태어나 1238년(고종 25)에 시어사(侍御史)로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이어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등을 역임하였다.
1275년(충렬왕 2) 전라경상양도(全羅慶尙兩道) 도지휘사가 되어 동정[東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때 어느 날 밤 꿈에서 허리에 찬 금어[金魚: 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자 스스로 해몽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집무를 할 수 없다.” 하고 사퇴하였다.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치사(致仕)하였고, 1291(충렬왕 17)에 죽자 시호를 양간(良簡)이라 하였다.
김석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매산(梅山)이며, 김연의 7세손이다. 1469년(예종 1)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녹사(錄事)와 통사랑(通仕郞)이 되었다가 계공랑(啓功郞)에 올랐을 때 예종이 승하하니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으로 익대순성명량훈(翼戴純誠明亮勳)을 받았다.
1473년(성종 3)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서 좌리훈(佐理勳)에 책록되었다. 1476년(성종 7)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을 거쳐 1481년(성종 13) 승문원교리로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1482년(성종 14)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전라남도 유덕사(遺德祠)에도 배향되었다.
김기서는 조선 전기의 선비로 호는 돈목재(敦睦齋)이고, 김석원의 조카로 고창읍 호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모가 병환에 걸리자 온갖 방법을 다하여 요양케 하였고, 상중에는 죽을 먹으면서 예를 다하여 시묘하다가 복을 마친 뒤에도 여묘(廬墓)에서 그대로 살면서 그곳을 시묘동(侍墓洞)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508년(중종 3)에 조정으로부터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고 정려를 받았다.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가 양팽손(梁彭孫) 등과 경의(經義)를 강론하다가 1517년(중종 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 등 신진 사람들이 대거 숙청당하자 세속을 등지고 두문불출하였으며, 1623년(인조 1)에 전불사(典佛寺) 불당지(佛堂址)인 이곳에 만년의 거소를 겸한 강학당을 건립하였다.
김경희는 조선 전기 학자로 자는 용회(用晦), 호는 노계(蘆溪)로 김기서의 아들이다. 고창읍 호동에서 출생하였고, 외삼촌인 학포(學圃) 양팽손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고 시에 능하였으며, 중종 때 동국필원(東國筆苑)에 참여한 명필이었다. 1534년(중종 29)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김안로 등의 농간으로 낙방하자 중종이 금장(金粧) 『두시전질(杜詩全帙)』을 하사하여 위로하였다고 한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천변 바위 위에 정자 취석정(醉石亭)을 지어 도의로 사귄 이만영(李萬榮), 송인수(宋麟壽), 양응정(梁應鼎) 등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고창의 월계서원(月溪書院)과 노산사에 배향되었다.
심진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진경(晉卿)이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후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내금위장(內禁衛將) 등을 거쳐 1721년(경종 1)에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신임사화로 집권한 소론의 강경파가 노론의 완전한 처단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조카인 심상길이 여기에 연루되자, 이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1726년(영조 2)에 관작이 복구되었고, 1783년(정조 7)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800년(정조 24)에 충민(忠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위치]
고수면 상평리 전동마을 뒷산에 있다. 노산사와 김기서 강학당은 고수면 상평리 복용마을과 전동마을 사이의 조광골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노산사는 1781년(정조 5)에 김기서, 김경희를 배향하고 전동사(典洞祠)라고 하였다가, 1826년(순조 26)에 고창읍 내동리로 옮기면서 김현을 주벽으로 하여 5현을 배향하면서 노산사로 이름을 고쳤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5년에 전동의 옛터에 단을 세웠고, 1961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노산사의 건물은 사우, 강당, 경앙문, 돈목재(敦睦齋) 강당[김기서 강학당], 전사실, 내삼문, 고직사 등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돈목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황]
강학당인 돈목재는 김기서가 만년에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1548년(명종 3)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강학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벼개마루 대청의 중당(中堂) 2칸과 좌협실(左挾室)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소박한 건축 양식 건물이다. 김기서 강학당은 1981년 4월 1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