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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156
한자 寺刹
영어음역 Sachal
영어의미역 Temple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옥영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부처를 숭상하고 불법을 익히는 장소.

[개설]

사찰은 절, 사원(寺院), 정사(精舍), 가람(伽藍)이라고도 한다.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 수행자들이 우기를 피해 한 곳에 모여 생활을 하는 공동 주거지의 성격을 띠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종교 의례를 행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변모하였다. 전라북도 고창군의 주요 사찰과 사찰 터를 살펴보고자 한다.

[주요 사찰]

1. 선운사(禪雲寺)

선운사아산면 삼인리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고창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뒤의 중수 기록은 비교적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고려 시대인 1354년(공민왕 3)에 효정(孝正)이 중수하였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1472년(성종 3)부터 10여 년에 걸쳐 극유(克乳)가 다시 크게 중창하였다. 이 때 선운사는 건물이 189채나 되는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는데,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이후 1613~1619년에 다시 중창되었으며 1839년에 비로 인해 법당이 2칸 정도 무너져 1840년에 중수를 마치기도 하였다.

17~19세기 초의 선운사 사적에 대한 기록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殿閣寮舍創建年代芳名列目)」이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어 선운사의 내력 및 건물의 중수 사실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성기의 선운사는 승려 3천여 명에 거느린 암자만도 89개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현재 대웅보전·영산전·관음전·명부전·만세루·팔상전·사물각·산신각·천왕문 등 10여 동 건물과 4개의 암자만 남아 있다.

2. 문수사(文殊寺)

고수면 은사리문수산[취령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에 해당되는데, 643년(의자왕 3)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즉 사찰에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취령산이 당나라에서 수행했던 청량산(淸涼山)과 같은 느낌을 줌에 따라 이곳 석굴에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를 드렸는데, 땅속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자장이 그곳을 파 보았더니 실제로 문수석상(文殊石像)이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석상을 모실 문수전(文殊殿)을 건립하고, 절 이름도 문수사(文殊寺)라 하였다 전해지고 있다.

문수사가 자리한 취령산은 『고창읍지(高敞邑誌)』에 “취령산은 고수면에 있는데, 우리산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문수산, 혹은 청량산이라고도 한다[鷲嶺山在古水面或稱牛利山今稱文殊山一云淸涼山]”고 설명하고 있다. 문수산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취령산이 청량산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표현이나 자장율사와의 관련성은 이러한 다양한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590년에서 658년까지 살았던 신라의 승려다. 636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643년에 귀국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주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고, 645년에 실제로 황룡사 9층 목탑이 완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자장문수사를 창건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당시 이곳이 백제 땅이었던 만큼 신라의 승려가 백제 땅에다 사찰을 창건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문수사는 1607년(선조 40)과 1704년(영조 16)에 각각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문수전, 명부전, 나한전, 누각, 요사, 산문(山門) 등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1618년(광해군 10)에 인해(仁海)가 창건하고, 1690년(숙종 16) 종희(宗僖)가 중건한 내원암(內院庵)과 양진암(養眞庵)이 있다.

3. 상원사(上院寺)

상원사는 고창의 진산인 방장산(方丈山)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에 창건의 밀명을 받은 승려 고봉(高峰)과 반룡(盤龍)이 백제 땅인 이곳 고창 지역에 들어와 546년(성왕 24)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착공에서 준공에 이르는 2년 6개월 동안 소요된 비용은 전(錢) 5천 냥, 쌀 1천석, 철 3천근 등이었으며, 사찰에 딸린 전답만도 20결(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승려가 백제 땅에 와서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사찰 경내에서 삼국 시대 것으로 볼 만한 유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원사는 창건 이래 6차례 중창되었다고 전한다. 942년(태조 25)에 은장법사(隱藏法師)가 중건한데 이어 조선 시대에 들어와 1650년(효종 1)에 2차, 1734년(영조 10)에 3차, 1848년(헌종 14)에 4차 중창이 있었으며 1939년에는 최지련(崔智蓮)이 5차 중수를, 다시 1947년에 송용헌(宋龍憲)이 6차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상원사의 당우(堂宇)로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각과 종각이 있고, 노사나불·석가모니불 등의 불상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6, 고창현(高敞縣)의 불우(佛宇)조에 보면 상원사에는 11층의 청석탑(靑石塔)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4. 용화사(龍華寺)

용화사는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계의 사찰로 1950년에 창건되었으며 대산면 연동리 산75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661㎡의 대지에 대웅전, 미륵전, 오층석탑, 종각, 그리고 요사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오층석탑은 높이가 7m에 이르는데 1987년에 건립된 것이다.

5. 소요사(逍遙寺)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용산리의 서쪽 해안가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 소요산인데, 이 소요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 바로 소요사다. 소요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고창군 내에 있는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설화로 전해지고 있을 뿐인데, 백제 위덕왕 대에 해당하는 554~597년에 소요대사(逍遙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사찰 내에 남아 있는 유물 등을 고려해 볼 때 믿을 만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통일 신라 시대 말기에 도선선사(道詵禪師)가 도를 깨친 다음 수도 정진할 때 일시 수도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전국에 걸쳐 도선선사와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이 또한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들어 소요사에서는 이름난 승려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정유재란 때에는 요사만 남고 모든 것이 불타버렸는데, 광해군 때에 대웅전이 중창됨으로써 다시금 사찰로써의 위용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중창된 대웅전도 6·25전쟁 때 또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그에 따라 소요사 자체도 명찰로서의 면모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1년에 승려 현학(玄鶴)에 의해 대웅전이 재건됨으로써 현재와 같은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1975년 5월에는 대한불교 태고종에 등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방장사(方丈寺)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 산1-3번지[방장로 259-48]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고창의 영산 방장산 동쪽으로 장성군과 고창군 경계에 위치한 1500여 년의 고찰이다. 가파른 벼랑 위에 매달리듯 가까스로 세워져 있어 오후에나 햇빛이 들 정도인데, 구름이나 안개가 많은 날에는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도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에는 임공사(臨邛寺)로 기록되어 있다. 임공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설화로 전해질 뿐인데, 544년(진흥왕 5)에 불사 창건령의 밀명을 받고 고봉·반룡 등 두 법사가 백제 땅인 고창의 방장산에 와서 546년(성왕 24)에 상원사(上院寺)의 말사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이어져 오다가 1917년에 승려 도안이, 1958년에는 승려 청강 만오가 재건했으며 1977년에는 승려 법전이 다시 중창하고 방장사(方丈寺)라 개명하였다. 2006년 10월에는 대한불교 조계종에 방장사로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며, 요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마애석불좌상과 동종이 있다.

[사찰 터]

사실 고고학적인 지표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몇몇 조선 시대 지리지(地理誌)에는 고창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찰명이 남아 있다. 우선, 당시 흥덕현(興德縣) 관내에는 고봉사(高峰寺)·신흥사(新興寺)·용계사(龍溪寺)·운장사(雲藏寺)·용장사(龍藏寺)·백운사(白雲寺)·수월사(水月寺)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수월사는 소요산(逍遙山)에, 백운사는 화시봉(火矢峰)에 있었으며 나머지 사찰들은 반등산(半登山)에 있었다고 한다.

고창현(高敞縣) 관내에는 상원사(上院寺), 문수사(文殊寺), 안덕사(安德寺), 임공사(臨邛寺)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원사와 임공사는 반등산(半登山), 즉 방장산(方丈山)에 있었고 문수사문수산에, 안덕사는 화시봉(火矢峰)에 있었다고 한다. 무장현(茂長縣) 관내에도 선운사(禪雲寺)를 비롯하여 중애사(重愛寺), 참당사(懺堂寺), 서봉사(瑞峯寺) 및 수고암(水庫庵)이 있었다고 하며 선운사·중애사·참당사는 선운산(禪雲山)에, 서봉사는 고산(高山)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창 지역에는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많은 수의 사찰과 암자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현재 위치조차 불분명한 실정이다. 현재 고창 지역에 흔적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지로는 갈산사지(葛山寺址), 수월사지(水月寺址), 상등리사지(上登里寺址), 운곡리(云谷里) 미륵사지(彌勒寺址), 안덕사지(安德寺址) 등을 들 수 있다.

1. 갈산사지

흥덕면 교운리(橋雲里)흥덕향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지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관련 문헌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다만, 고려 전기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는 전언(傳言)이 있으며, 실제로 향교 입구 근처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이곳이 원래는 절터 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당간지주 이외에도 주변 민가의 담장을 조사해 보면 사찰 관련 석재들이 쉽게 눈에 띈다. 그런 점에서 이곳에 사찰이 있었을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 보인다.

갈산사지가 언제 폐사(廢寺)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 흥덕향교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향교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폐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당간지주가 양식상 고려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고려 시대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존속하였던 사찰로 여겨진다. 당간지주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2. 수월사지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용산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다. 한 마디로 수월사지라 하지만 이른바 ‘아래절터’와 ‘웃절터’ 등 두 곳으로 절터가 나누어져 있다. 용산마을에서 북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약 1.2㎞ 쯤 올라가면 5척 높이의 자연석 석축 기단이 군데군데 허물어진 채 약 30m 길이로 늘어서 있다. 이 석축 기단 위에는 주춧돌이 흩어져 있고, 기와편들도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이곳이 바로 수월사(水月寺)의 ‘아래절터’이다.

이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계곡을 따라 약 500m 정도를 더 올라가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바윗돌이 수 십 미터 길이로 연결되어 있는 일명 ‘기차바위’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도 역시 21m 정도 되는 자연석 축대가 동서 방향으로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눈에 보아도 절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수월사의 ‘웃절터’이다.

수월사 ‘웃절터’의 규모는 동서 54m, 남북 45m 정도 되는 매우 큰 규모인데 현재에도 초석의 일부와 우물터가 남아 있다. 주변에 기와편이 널리 흩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이 수월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흥덕현 불우(佛宇)조에 소요산에 있는 사찰로 소개하고 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여지도서』의 편찬시기 등을 고려해 볼 때 적어도 1760년(영조 36) 경까지는 사찰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8세기 중엽 경까지도 존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수월사가 언제, 어떠한 이유로 폐사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전해오는 전언(傳言)에 따르면 감사(監司) 임모(林某) 씨가 자신의 조상 무덤을 수월사 경내에 쓰기 위해 강제로 폐사시켰다고 한다.

3. 상등리사지(上登里寺址)

고창군 부안면 상등리에 남아 있는 옛 절터다. 그러나 이 절터의 연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언제, 누가, 어떻게 창건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6·25전쟁 때 상등리사지 위쪽에 있던 제방이 터지면서 물에 휩쓸려 흔적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때의 홍수로 상등리사지에 있던 탑은 부안면 오산리(五山里)부안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보존되고 있다. 탑은 세부 특징을 고려해 볼 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상등리사지 역시 이 시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중애사지(重愛寺址)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번지[선운사로 250]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옛 절터다. 이 중애사지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명칭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존속했던 사찰로 보인다. 고창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중애사지 역시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피하여 선운산 진흥굴에 머물러 있을 때 꿈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출현하는 것을 보고 선운사, 도솔사 등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문수사에서 남쪽으로 2, 3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며 수목이 울창하여 그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5. 운곡리 미륵사지

아산면 운곡리(云谷里)에 자리하고 있는 약 3만 3,058㎡ 규모의 절터이다. 존재 자체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아산댐 수몰 지구 조사에 의해 확인되었다. 정밀 지표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운곡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울창한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석축대와 초석이 자리하고 있고, 조선 중기에 해당되는 백자요지도 절터 안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에 해당되는 백자요지가 있는 점으로 볼 때 사찰 자체는 그 이전에 폐사된 것이 분명하다. 만약 사찰이 조선 중기 이전에 폐사된 것이 분명하다면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볼 수 있다.

6. 안덕사지

고창현 관내에 있었다는 사찰 중의 하나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화시산(火矢山)[화시봉]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까지 존속했던 사찰임이 분명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와 폐사(廢寺)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지형을 고려해 볼 때 동서 45m, 남북 54m 범위 내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는 초석과 함께 기와편, 자기편, 토기편 등이 산재해 있으며 고려 시대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황]

2010년 현재 고창군에 있는 사찰 수는 총 32개이며 지역별로는 고수면 2개, 고창읍 10개, 대산면 2개, 무장면 3개, 부안면 1개, 성송면 2개, 신림면 3개, 심원면 1개, 아산면 6개, 흥덕면 2개 등이다. 종파별로 보면 대한불교 법화종 1개, 대한불교 본원종 1개, 대한불교 삼론종 1개, 대한불교 일승종1개, 대한불교 조계종 14개, 대한불교 태고종 1개, 한국불교 법륜종 1개, 한국불교 태고종 11개 등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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