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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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梵日 |
영어음역 | Beomil |
이칭/별칭 | 품일(品日),통효(通曉)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흥삼 |
[정의]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闍崛山派)를 개창한 선승(禪僧).
[개설]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강릉 지역에서는 대관령 성황신으로 신격화 되어 있으며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가계]
아버지는 명주도독(溟州都督)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며, 어머니는 문씨(文氏)이다.
[생애]
범일은 810년(헌덕왕 2) 음력 1월 10일에 명주에서 출생하여 15세에 출가하였다. 20세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836년에 두운(杜雲)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공부를 하고 847년 8월 귀국하였다. 851년에 명주도독의 초청으로 굴산사에 가서 사굴산문을 일으키고 그곳에서 40년간 후학을 지도하였다. 889년(진성여왕 3) 5월 1일 굴산사 상방(上房)에서 입적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80세였고 승랍(僧臘)은 60세였다.
[활동사항]
836년 당나라 항주(杭州)에 이르러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일시 머물다가 각지로 순례(巡禮)의 길에 올라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찾았다. 마침내 마조(馬祖)의 법사(法嗣) 염관(鹽官) 제안(濟安)을 뵙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6년(836~842) 동안 제안대사 문하에서 그 법인(法印)을 전수 받았다. 그가 사망한 후 약산(藥山)에 이르러 선문답(禪問答)을 나누었다.
제리(帝里)[長安]에 들렀을 때, 844년 당 무종(武宗)이 외국의 승려들을 귀국토록 하였으나 범일은 이를 어기고 난을 피해 동분서주하며 각고(刻苦)하다가 황하에서 하백(河伯)의 도움을 받았다. 그 뒤 상산(商山)에 은거하여 반년 동안 혼자서 선정(禪定)을 닦았다.
후에 소주(韶州)에 가서 혜능(慧能) 조사탑(祖師塔)을 예배하려는 뜻을 세우고, 조계(曹溪)에 이르니 향기로운 구름이 일어나 탑묘(塔廟) 앞에 서리고 신령스러운 학이 어느새 날아와 누대(樓臺) 위에서 울었다.
847년에 귀국한 뒤, 851년 정월에 백달산(白達山)에서 연좌(宴坐)를 하고 있을 때 명주도독이 굴산사(掘山寺)에 주석하기를 청하여 입적(入寂)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그곳에서 전법(傳法)하였다.
이후 대중 12년(858)에 명주 개국사에서 만난 신라 사미승(沙彌僧)과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명주 익령현(翼嶺縣)[襄陽]에 이르러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얻은 후 낙산사(洛山寺)에 전(殿) 3칸을 만들어 모시었다.
범일이 굴산문에 머무른 이후 함통(咸通) 12년(871) 3월에 경문왕(景文王)이, 광명(廣明) 원년(880)에 헌강왕(憲康王)이, 광계(光啓) 3년(887)에 정강왕(定康王)이 국사(國師)로 봉하고자 했으나 끝내 왕실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의 통치력이 미치기 어려운 북쪽 변방에 거주하고 있었고, 명주 지역의 반신라적 성향과 선종의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이다. 그의 문하에는 개청·행적(行寂)·신의(信義) 등 십성제자(十聖弟子)가 있었다.
[학문과 사상]
범일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주장하여 도는 수행하거나 분별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또 그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통하여 불법의 큰 뜻은 자기의 본래심을 주체적으로 인식하여 불성(佛性)이 구족되었음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깨달음이 조사나 부처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몸으로 체험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과 관련하여 그는 ‘자심(自心)’이 곧 부처라며, 깨달음은 이를 통하여 얻어야 한다면서 이를 아는 것이 선(禪)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또 범일은 깨달음은 문자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만 직접 체험할 수 있다[自內證]는 『능가경(楞伽經)』에 열정을 보여 능통하였다.
한편, 진표(眞表)의 미륵신앙(彌勒信仰)에 영향을 받아 범일은 간자(簡子)로 점쳐 낙산사에 정취보살상을 모시기도 하였다. 또 범일은 강서지법(江西之法)과 관련이 있는 마조의 법손(法孫)에게서 수학하여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수해 억제 등과 관련된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에 근거하여 굴산사와 신복사(神福寺)도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범일은 산신(山神)에 대한 믿음을 강렬히 드러내어 영적인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묘소]
‘연휘(延徽)’라는 탑명(塔名)으로 보아 부도가 있었을 것이나 현전(現傳)하지 않는다.
[상훈과 추모]
시호(諡號)는 통효대사(通曉大師)이고 탑호는 연휘이다.
[의의와 평가]
범일의 법(法)은 사굴산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다가 한국 불교의 중흥조인 지눌(知訥)에게 계승되었다. 이후 16국사가 배출되는 등 선문(禪門)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조계종(曹溪宗) 확립 등 한국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강릉 지방에서는 사후에 신격적(神格的) 존재로 승화시켜 대관령성황신(大關嶺城隍神)으로 모시고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섬기면서 지역의 결속을 다지는 인물로 숭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