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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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九鉉 |
영어공식명칭 | Choe Guhyeon |
이칭/별칭 | 인성(仁成),유곡(楡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남석 |
출생 시기/일시 | 1866년 - 최구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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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7년 - 최구현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최구현 창의도소 설치 |
몰년 시기/일시 | 1906년 - 최구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4년 - 최구현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최구현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
거주|이주지 | 최구현 거주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
묘소 | 최구현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
성격 | 항일 의병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군부(軍部) 참서관(參書官) |
[정의]
근대 개항기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항일 의병장.
[개설]
최구현(崔九鉉)[1866~1906]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하고 군부 참서관을 역임하던 중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당진시 송악면 기지시리에 창의도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면천읍성을 공격하였고, 석문면 소난지도를 근거지로 활발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화력의 열세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1906년 순국하였다.
[가계]
최구현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인성(仁成), 호는 유곡(楡谷)이다. 아버지는 승문원 부제조 최영환(崔永煥),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다. 정유재란 중인 1597년 영천 전투에서 전사한 충신공(忠信公) 최준립(崔埈立)의 12대 후손이다.
[활동 사항]
최구현은 면천군 매염리[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최구현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봉사(奉事)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군부(軍部) 참서관(參書官)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분을 억누를 수 없어 관직을 사임하고, 1906년 송악면 기지시리에 창의도소(倡義都所)를 설치하였다. 최구현이 의병을 모집하는 창의문(倡義文)을 게시하자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에서 370명의 주민들이 격문을 보고 모여들어 의병이 되었다. 최구현은 이곳에서 창의 영도장(倡義領導將)으로 추대되었고, 의병을 지휘하며 15일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위세를 드높였다.
최구현이 이끄는 의병들은 1906년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일본 경찰대와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결국 퇴각했다. 이후 의병 36명을 인솔하여 화성 창의소 홍일초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6월 7일에는 홍주성에서 패한 홍주 의병 차상길이 15명을 인솔하여 합류했다.
최구현 의병은 1906년 6월 18일, 홍일초 부대와 함께 면천성을 다시 공격하여 군수 이교영(李喬永)을 포박하고 이속(吏屬)을 난타하여 결전 350냥과 양총 5정, 탄환 85발, 환도 2정을 탈취했다. 또한 1906년 8월 중순에도 다시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거듭되는 최구현 의병 부대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관군과 일본 경찰대는 1906년 8월 24일, 의병의 본거지인 소난지도를 급습해 최구현을 체포했다. 최구현은 면천에 끌려와 일본 수비대의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지만 1906년 음력 12월 23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최구현의 행적은 순국 이후 1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최구현의 손자 최충묵이 묘지석(墓誌石)을 발견하면서 밝혀지게 되었다.
[묘소]
최구현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에 있다가 1927년경에 송산면 매곡리로 이장(移葬)하였고, 2003년에 다시 부곡리로 이장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구현의 공적을 기려 2004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