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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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以興將軍一家遺品 |
영어공식명칭 | Artifacts Used by General Nam Iheung and His Famil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로 1길 73-48[도이리 37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기은 |
제작 시기/일시 | 1624년 - 남이흥 장군 영정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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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70년 12월 29일 - 남이흥장군 일가 유품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로 지정 |
출토|발굴 시기/일시 | 1971년 3월 1일 - 남이흥장군 일가 유품 출토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4년 9월 25일 - 남이흥 장군 유품에서 남이흥장군 일가 유품으로 명칭 변경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남이흥장군 일가 유품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 |
현 소장처 | 충장사 모충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로 1길 73-48[도이리 373-1] |
원소재지 | 남이흥 장군 묘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 |
출토|발견지 | 남이흥 장군 묘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 |
성격 | 유물 |
재질 | 초상화: 견본 채색(絹本彩色)|인조 곤룡포[보문단 겹답호]: 비단에 금실로 수 놓음|녹피방령포(鹿皮方領袍), 녹피 바지[鹿皮袴]: 사슴가죽|호패: 상아. 나무, 사슴뿔 |
크기(높이,길이,너비) | 99.5×191㎝[영정 초상화]|길이 122㎝, 화장 19㎝, 품 41.8㎝[곤룡포]|길이 143㎝, 화장120㎝, 품 53㎝[녹피방령포]|길이 112.5㎝, 허리둘레 120㎝[녹피 바지|가로 29.5㎝, 세로 33㎝[사패절목] |
소유자 | 의령 남씨 충장공파 대종중 |
관리자 | 14대 종손 남주현 |
문화재 지정 번호 | 국가민속문화재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의 모충관에 소장된 남이흥과 의령 남씨 일가의 유품.
[개설]
남이흥(南以興)[1576~1627] 장군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평안도 안주에서 후금(後金)군과 싸웠으나 전황이 어려워지자 적과 함께 자결하였으며, 그의 아버지인 남유(南瑜)[1552~1598] 장군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왜군과 싸우다 1598년(선조 31)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로 1길 73-48[도이리 373-1]에는 충장공(忠壯公) 남이흥 장군과 의천 부원군(宜川府院君) 남유 장군의 묘소와 사당 충장사(忠壯祠), 남씨 양세 충신 정려(南氏兩世忠臣旌閭), 그리고 전시관인 모충관(慕忠館)이 있다.
모충관에는 공신도상(功臣圖像) 초상화[影幀]를 비롯한 남이흥 장군의 유품과 의령 남씨(宜寧南氏) 선후대 유품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전시된 유품들은 1970년 12월 29일 ‘남이흥 장군 유품’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 9월 25일 그 일가의 유물이 추가 지정되면서 명칭이 ‘남이흥장군 일가 유품’으로 변경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유품은 초상화(影幀) 1점을 비롯하여 곤룡포[답호] 등의 의복 7점과 고문서 13점, 갑옷 1점, 호패 6점, 생활 자료 10점 등 총 38점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의 물품들이다. 이외에도 모충관에는 근대 후손들의 유물 등 일가의 유품 500여 점이 더 보관되어 있다.
[형태]
견본 채색(絹本彩色)된 영정 초상화[공신도상]의 크기는 가로 99.5㎝, 세로 191㎝이다. 곤룡포[보문단 겹답호]는 길이 122㎝, 화장 19㎝, 품 41.8㎝으로 비단에 금실로 수를 놓은 흔적이 보인다. 갑옷 받침인 녹구의[녹피방령포]는 길이 143㎝, 화장 120㎝, 품 53㎝이며 녹피 바지[鹿皮袴]는 길이가 112.5㎝, 허리둘레 120㎝이다. 사패절목(賜牌節目)[땅문서]은 29.5㎝, 33㎝이며 7장으로 되어 있다. 그 외 상아, 나무, 사슴뿔[鹿角] 등으로 만든 호패가 6점이 있고 활집과 두루마기 종류인 철릭[天翼] 3점, 여자용 쓰개인 장옷 1점 등 의복이 있다.
[특징]
양세 충신에게 하사된 당진시 대호지면 전역과 정미면 천의리, 승산리일대의 토지를 하사한 사패절목[현재의 등기]에는 대군을 비롯한 어떤 권력자도 이 땅을 침탈할 수 없으며 어업권과 염업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남이흥 장군에게 하사된 많은 유물과 직접 사용하던 유물 중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생시 모습이 그려진 공신도상 초상화와 정묘호란(丁卯胡亂) 순절 후 인조가 국장으로 장례하도록 하고 입고 있던 곤룡포를 장군의 관[棺] 위에 덮어 주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는 곤룡포[답호] 등은 충신에 대한 왕의 특별한 배려가 스며 있는 자료이다. 1971년 남이흥과 남유의 묘를 경기도 광주에서 대호지면 충장사로 이장할 때 찾아 낸 의복들은 옷의 형태가 임진왜란 이전의 특징을 보이므로 남유의 유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모충관에는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에서 순절한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유품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답호 등의 복식과 호패, 서한, 고서, 교지, 의류, 영정, 천묘(遷墓) 때의 관 등 다수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16세기에서 17세기 초의 물건으로 남이흥 장군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이 대다수이다. 따라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의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 희귀한 유물로 애국 충절의 귀감이 되는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유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