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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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宜寧南氏 |
영어공식명칭 | Uiryeong Namsi|Uiryeong Na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기은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601년 - 의령남씨 당진 입향조 남두극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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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65년 - 의령남씨 당진 입향조 남두극 사망 |
본관 | 의령(宜寧) - 경상남도 의령군 |
입향지 | 의령남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
세거|집성지 | 의령남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
묘소|세장지 | 의령남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
성씨 시조 | 김충(金忠) |
입향 시조 | 남두극(南斗極) |
[정의]
남민이 시조이고 남두극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시조는 남민(南敏)이며, 원래 중국 봉양부(鳯陽府) 여남 사람인 김충(金忠)이다. 김충은 755년 이부 상서 안념사(按廉使)로 일본에 다녀오다가 풍랑을 만나 신라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신라 왕이 여남 땅에서 왔다 하여 남(南)씨 성을 내리고 영의공(英毅公)에 봉했다. 이후 남민의 7세손인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 중 맏아들 남홍보(南洪甫)는 영양(英陽), 둘째 남군보(南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남광보(南匡甫)는 고성(固城)을 본관으로 하고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남씨 중에서 남군보를 중시조로 하는 의령남씨가 가장 성하여 남씨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남재(南在)[1351~1419], 남은(南誾)[1354~1398] 형제가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 정계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연을 맺거나 당쟁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많은 관료와 학자들을 배출하여 씨족의 위세를 높혔다.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대동 운보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의령 남씨를 조선의 20대 가문의 하나로 꼽고 있다. 의령남씨는 조선 시대에 정승 6명, 대제학 6명을 배출했고, 문과 급제자도 140명이 넘는다.
[연원]
의천 부원군(宜天府院君) 남유(南瑜) 장군과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1576~1627] 장군이 대호지면 전 지역과 정미면 일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았고, 14세손인 면천 군수 남두극(南斗極)[1601~1665] 때부터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입향 경위]
남두극은 할아버지 남유와 아버지 남이흥이 대호지면과 정미면을 사패지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대호지면 도이리에 정착하였다.
[현황]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373-1에 양세 충신 남유와 남이흥 장군 묘역이 있고, 충장사(忠壯祠) 건너편 서쪽 방향 200m 지점인 유곡 묘원(遺谷墓圓)에 후손들의 묘소가 있다. 당진시 대호지면에는 남이흥의 후손들이 주로 많이 살며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관련 유적]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일대에 충장사가 있으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52호인 남이흥 장군 묘 일원에는 남이흥 신도비와 남유 유허비를 비롯한 남씨 양세 충신 정려가 있다. 국가 민속 문화재 제21호인 남이흥 장군 유품을 전시한 모충관과 근대 민족 교육의 산실 도호의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