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206 |
---|---|
한자 | 漢津里 |
영어공식명칭 | Hanjin-ri |
이칭/별칭 | 대진(大津)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별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한진리는 송악읍 소재지에서 12㎞ 정도 떨어진 북쪽끝 아산만 가에 있는 포구 마을이다. 한때는 일본으로 어란을 수출하는 항구이기도 했으며, 평택 만호리와 인천을 오가는 배가 다녔다. 당나라 시대부터 큰 나루[大津]라 하여 당나라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면천, 당진, 태안, 홍주, 결성, 보령, 남포, 비인, 한산 등지에서 한진을 거쳐서 아산만을 나룻배로 건너 마주보는 옛 수원 땅에 상륙한 후에 육로로 서울로 가는 큰길이 있었다. 조선 시대 수군만호가 주둔하여 13척의 병선과 약 800명의 선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마을 남쪽에 대규모 부곡 공단이 개설되어 많은 공장들이 입주했으며, 인접지에 중외 제약이 있다. 1990년 초까지도 준치, 민어, 꽃게, 숭어 등이 많이 잡혀 어항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아산만과 삽교천 방조제 완공으로 현재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진두리(津頭里)를 개칭하여 아산만 가의 큰 나루, 즉 한나루[漢津]라 하여 한진리(漢津里)가 되었다. 한나루를 큰 나루라는 뜻으로 훈차하여 대진(大津)이라고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한진리는 본래 홍주목 신북면(新北面) 진두리(津頭里) 지역이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면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한진리로 개칭하여 송악면에 편입되었다. 2010년 1월 1일 송악면이 송악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12년 1월 1일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어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로 개편되었다.
[자연환경]
한진리는 우리나라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아산만 바닷가 포구 마을로 1930년대부터 아산만 해상 교통의 항구이자 어업 전진 기지이다. 한때는 황해도 앞바다까지 가서 조기를 잡아 왔으며 파시(波市)[고기가 한참 잡힐 때에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가 서기도 하였다.
[자연 마을]
한진리에는 마루머리, 해방촌, 노적봉, 선돌바위, 목너머, 아랫말, 영전, 동촌, 용천동, 함박골, 구억말, 시월이, 옥우물, 봉골, 시동시, 동양촌, 수문개, 남창, 작은덩이, 큰덩이, 연무시, 구억바다, 당재, 방터, 선장말, 터진목골의 26개 자연 마을이 있다.
나루머리[津頭]는 한진리 동쪽 나룻개 바다에 면해 있는 마을로,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를 거쳐 한양으로 통하던 나루터이다. 예전에는 인천과 정기 연락선이 다니기도 하였다. 옛 신북면 진두리 지역으로 한나루라고도 부르며, 바다 쪽으로 쭉 뻗어 있어 나루 입구에 해당되어 ‘나루머리’라고 하였다.
해방촌(解放村)은 6·25 전쟁을 통하여 월남한 피난민들이 정착하여 안전한 생활을 하기에 붙여진 지명이다. 선착장 서쪽 옛 전도관 부근에 있었다.
노적봉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산세가 마치 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부락명이다. 선창장 남쪽 해안에 있는 마을이다.
선돌바위는 한진 뒷산 너머 해변가에 위치한 쌍바위가 나란히 서 있어서 붙여졌다는 설과 멀리서 해안가를 볼 때 바위를 먼저 발견할 수 있어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가옥은 없고 고대 공단으로 지정되어 동국 철강이 입지했다.
목너머는 한나루 선착장에서 남서 방향의 평지에 있다.
아랫말은 동녘말 아래쪽 마을을 ‘아랫말’이라 하며, 선착장 부근에 있다.
영전은 선착장에서 북서 방향으로 한진 2구로 넘어가는 중간 마을이었으나, 고대 공단으로 편입되었다.
동촌(東村)은 한진 2구에서 제일 큰 마을로 마을 회관 동쪽에 있고 동녁말이라고도 부른다. 나루머리 쪽에서 보면 남서쪽에 있고, 고대리 고잔 마을에서 보면 동쪽에 있다. 용천동, 영전, 함박골, 구억말, 시월이 등의 소부락이 속해 있다.
용천동은 동촌의 북서쪽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부락 지형이 용의 발톱처럼 생겼다는 설과 옛날에 마을 앞 들에서 비오는 날 용이 올라갔다는 설이 있는데 용이 숨쉬는 명당자리가 있기에 지명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함박골은 동촌의 동쪽에 있으며, 구억말은 동촌의 남쪽에 있다.
시월이는 동촌의 동쪽 구억말 바로 옆에 있으며 한진 1구와 경계를 이룬다.
옥우물은 동촌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물이 맑고 맛이 좋은 옥정(玉井)이 있어서 이름이 유래하며, 현재도 물이 잘 난다. 또 동네에서 여러 군데 파도 우물이 안 나오는데 이곳에서만 물이 나와서 ‘외골물’이 변해서 ‘옥우물’, 즉 ‘옥정’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봉골, 시동시, 동양촌, 수문개 등의 소부락이 속해 있다.
봉골은 옥정 서쪽에 있다. 상주 황씨가 파묘시 천개를 떼니 봉이 날아가서 혹은 묘지 형국이 봉의 형태여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시동시는 옛날에 3호가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고 고대 공단에 편입되었다.
동양촌은 옥정의 한가운데 양지변에 있었다.
수문개는 옥정의 북쪽 해변가 큰 수문 안의 개안 쪽에 마을이 위치했다.
남창은 옥정의 북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고대 공단에 편입되었다.
작은덩이는 야산 이름인데 북쪽은 바닷가와 연결되어 있고 남쪽에 1호가 있었으나 고대 공단에 편입되었다.
큰덩이는 작은 덩이와 연결된 야산인데 가운데 골에 논이 있었으나, 현재는 고대 공단에 편입되었다.
연무시는 옥우물 동촌의 남쪽에 있으며, 한진선 도로변에 있다.
구억바다는 동촌의 동쪽으로 예전에 1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주위가 삼태미처럼 둘러싸여 있고 현재 논밭으로 되어 있다.
당재는 동촌의 동쪽인데 한진 1구로 넘어가는 등성이로 옛날에 서낭당이 있었다. 현재 당재 밑에 마을이 있다.
방터는 옥정의 북쪽 큰덩미와 작은덩미 사이에 있다. 일부는 고대 공단에 편입되어 일부만 남았다. 안방처럼 아늑한 들이라 방터들이라고 부른다.
선장말은 동녘말 건너에 있는 마을로, 부락 지형이 배 모양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터진목골은 연무시 마을 아래쪽 마을이다. “마을 앞 들이 터진 것처럼 넓다.” 해서 옛날부터 ‘터진목골’이라 불렀다.
[현황]
2016년 현재 면적은 3.588㎢이고 인구는 898세대에 총 1294명[남자 838명, 여자 457명]이다. 북쪽과 동쪽은 아산만에 접하고, 평택시와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며, 1970년대 말까지 한진~평택 만호리를 오가는 나룻배가 운행되었다. 남쪽은 부곡리와 서쪽은 고대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지방도 619호선 도로가 당진~기지시~한진 간에 개통되어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1925년부터 1967년까지 수산물 전용의 한진장이 서기도 하였다. 한진 풍어당굿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