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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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東 張氏 |
영어공식명칭 | Indong J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용 |
본관 | 인동 장씨 본관 -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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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인동 장씨 입향지 - 충청북도 청주시 |
세거|집성지 | 인동 장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가산리 |
세거|집성지 | 인동 장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호명리 |
성씨 시조 | 장금용 |
입향 시조 | 장덕생 |
[정의]
장금용을 시조로 하고 장덕생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개설]
인동 장씨(仁東 張氏)의 시조는 고려 전기 인동현(仁同縣)의 옥산(玉山) 땅에 처음 정착한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이다. 또 다른 인동 장씨는 고려 충렬왕 때 국학진사 권지도평의녹사 동진사에 등과하여 예문관 직제학에 오른 장계(張桂)를 시조로 하는 일파가 있으나 족세가 크지 않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유록(遺錄)에 따르면 고려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공을 시조로 모신 것은 선대 조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장금용 이래로 후손들은 칠곡(漆谷) 인동을 관향으로 하여 세거하여 왔다.
[연원]
13세손 장백(張伯)은 고려 우왕 때 태상경(太常卿)으로 문하시중 도첨의밀직사를 지냈는데, 후에 좌리공신에 녹훈되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하여졌다. 따라서 후손들은 장백을 중시조로 하고 옥산을 본관으로 하였는데, 조선 후기 옥산이 인동으로 바뀌면서 본관을 인동이라 하였다. 후손 중에는 옥산을 본관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인동 장씨는 고려 전기 인동에 정착한 이후 분파되었는데, 대략 25개 파로 나뉜다. 인동 장씨 족보는 임진왜란 때 없어진 옛 족보를 전쟁 뒤 장현광이 자신의 기억과 전하는 이야기를 엮어 장금용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정리한 『여헌수록(旅軒手錄)』을 근간으로 편찬되었다.
충청북도의 인동 장씨는 청안 지역에 입향한 청안파(淸安派)와 청주파(淸州派)로 나뉜다. 청안파는 9세손 장인계(張仁溪)에서 분파하였는데, 장인계는 고려 때 통훈대부 판통례문사를 역임하였다. 청주파는 10세손 장득선(張得宣)을 파조로 하여 분파하였다. 장득선은 고려 때 무신으로 호는 청계(淸溪),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충렬왕 때 사순위중랑장을 지냈는데, 외적의 침입을 막다 순절하였다. 충숙왕이 평장사에 증직하고 기성군에 봉하였다.
[입향 경위]
14세손 장덕생(張德生)은 호가 모은(慕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매헌(梅軒) 문혜공(文惠公) 장안기(張安起)의 아들로 1402년(태종 2)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와 사헌부장령 등을 지내고 화성군에 봉하여졌다. 1432년(세종 14) 함안군사와 진주병마첨절제도위를 지냈다. 장덕생이 함안군수를 지낸 뒤 청주에 이거하여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관련 유적]
상당구 남일면 가산리에는 마을 입구에 ‘인동 장씨 청주파 세거지’ 표석이 있다. 표석 아래의 표지에는 14세손 장덕생의 약력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장덕생의 묘소는 가산리에 있다. 청원구 북이면 호명리는 인동 장씨 호명파의 세거지이다. 종파(宗派)로 20세손 장사림(張士琳)이 입향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장사림은 임진왜란 의병에 참여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북으로 피난하다 호명리로 입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명리 마을 뒤쪽에는 장사림의 묘소가 있고, 아래에 사당인 삼보사(三寶祠)가 있다. 장사림의 묘소 뒤쪽에는 할아버지 장도(張濤)와 아버지 장륜(張崙)의 단묘(壇墓)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