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15 |
---|---|
한자 | 慶州 李氏 |
영어공식명칭 | Gyeongju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용 |
[정의]
이알평을 시조로 하고 이공린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연원]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시조는 이알평(李謁平)이며, 중시조는 신라 말의 이거명(李居明)이다. 이거명이 중시조가 된 이유는 시조로부터 이거명까지 계대가 자세하지 않으며, 이색(李穡)이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를 적으면서 신라 말에 소판(蘇判)에 이른 이거명 이후의 세계를 자세하게 적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거명의 15세손 문하평리 이핵(李翮)에 이르러 3명의 아들과 9명의 손자가 모두 이름을 떨쳐 고려의 현족(顯族)으로 우뚝 섰다. 이핵의 세 아들인 이인정(李仁挺)·이진·이세기(李世基)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또한, 이인정의 두 아들과 이진의 세 아들, 이세기의 네 아들 등 모두 문과에 등제하였다. 이 시기에 경주 이씨는 관직에 대거 진출하여 8개파로 분파되었다. 이인정을 파조(派祖)로 하는 평리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 이관(李琯)의 이암공파(怡菴公派), 이제현(李齊賢)의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李蒨)의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李過)의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李蓚)의 사인공파(舍人公派)이다.
[입향 경위]
경주 이씨가 청주에 입향한 것은 이윤인(李尹仁)의 아들 이공린(李公麟)[1437~1509] 때이다. 이공린은 자가 백시(伯時)이며, 박팽년(朴彭年)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공린은 1456년(세조 2) 장인 박팽년이 연루한 사육신의 죄에 연좌되어 30여 년 간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이후 셋째 아들 이원(李黿)은 김종직의 문하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유배를 갔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참형을 받았다. 이공린과 다른 아들들도 연좌되어 모두 유배를 갔다. 당시 이공린은 창평현령(昌平縣令)에서 파직되어 3년 동안 해남으로 귀양을 갔는데, 중종이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 여러 차례 화환(禍患)을 겪은 뒤 나이가 많아 벼슬할 생각이 없어 청주로 물러나 한가하게 지냈다. 이후 이공린의 막내 아들 이곤(李鲲)의 후손이 청주에 정착하였으며, 후손들은 벼슬에 나아가기보다는 재야에 있으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지냈다.
[현황]
2000년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경주 이씨는 청원군 내 다섯 번째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1,562가구, 5,096명이 거주하였다. 그중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에 62가구가 거주하였다.
[관련 유적]
경주 이씨의 유적은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가양리에 있다.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공린의 신도비가 있으며, 위쪽 산 능선에 이공린의 묘소가 있다. 여기에는 이공린의 첫째 아들 이오(李鼇)와 손자 이해(李海), 증손자 이사권(李嗣權)의 묘소가 모여 있다. 수락영당 뒤쪽으로 이곤의 묘소가 있으며, 마을 안쪽 산 능선에 이잠(李潛)과 이득윤(李得胤)의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