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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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谷山 延氏 |
영어공식명칭 | Goksan Yeo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용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31년 - 연정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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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11년 - 연정설 사망 |
본관 | 곡산 연씨 본관 - 황해북도 곡산군 |
입향지 | 곡산 연씨 입향지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노산리 |
세거|집성지 | 곡산 연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모충동 |
세거|집성지 | 곡산 연씨 세거지 -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 |
성씨 시조 | 연계령 |
입향 시조 | 연정설 |
[정의]
연계령을 시조로 하고 연정설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연원]
곡산 연씨(谷山 延氏)는 조선 전기에 개국공신인 연사종(延嗣宗)이 2차 왕자의 난으로 좌명공신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인물이 공신이 되고 관직에 진출하면서 가세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 이후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를 입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15세손 연보(延保)가 사도시부정에서 삭직되었고, 동생 연우(延佑)와 아들은 각각 병조정랑과 사재감판관을 하다가 사직하고 함경도 이원에 은거하여 이원 연씨(利原 延氏)의 파조가 되었다.
[입향 경위]
곡산 연씨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세손 연정설(延井渫)[1431~1511] 때이다. 연정설은 상주목사와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부인은 진주 유씨이다. 연산군부터 중종 대 초에 처가가 있던 노산리 근처에 입향하였다. 연정설은 사화로 세상이 어지럽자 관직을 버리고 현도면 노산리에 안한정(安閑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연정설의 신도비는 간재 전우(田愚)가 지었고, 송규수(宋奎洙)가 썼다. 연정설의 아들 연탁(延倬)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을 지낸 후 청원에 잠들었고, 연간(延侃)은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세손 연정보(延挺寶) 때에는 청주 동면에 들어왔고, 아들 대에는 묵정리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8세손 연준걸(延俊傑)은 예빈시정과 훈련원첨정을 지내었고,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연준걸의 묘소가 서원구 모충동 배티[梨峴]에 있다.
[현황]
곡산 연씨는 서원구 모충동 배티와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에 동족 마을을 형성하였다. 모충동 배티에는 1970년대 후반까지 40~50호 정도 살았으나, 현재 모충동에 거주하는 후손은 소수이다.
[관련 유적]
22세손 연최적(延最績)은 우암 송시열에게 수학한 후 1682년(숙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수암 권상하를 따라 학문을 닦았다. 이후 인현왕후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국문을 받고 31세에 사망하였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이후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고향에 충신과 효행 정려가 내려졌다. 연최적은 상당구 가덕면에 있는 검암서원(儉巖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