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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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遺蹟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Relics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집필자 | 신대광 |
[정의]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유교와 관련된 유적.
[개설]
우리나라에 전래된 유교는 삼국의 발생을 전후하여 한사군(漢四郡)[BC 108~AD 313]이 설치되면서 중국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사상이 도입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삼국시대 초기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유교문화의 수용이 더욱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유교의 기본 윤리인 삼강오륜은 전통사회의 일상적 실천원리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효경(孝經)이 중요시되면서 효(孝)의 덕목이 일찍부터 확립되었다. 또한 충(忠)의 규범은 국가 성장기의 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도 하였다.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忠·孝·勇·信·仁]도 유교윤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삼강(三綱)[忠·孝·烈]의 규범은 조선 초기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통해 모범적 인물들이 포상되고 사회적으로 장려되었다. 3강과 5륜의 규범이 대중 속에 널리 확산되어 사회윤리로 정립되면서, 전통사회의 도덕규범과 가치관의 근거로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오늘날에 유교와 관련한 기구로 재단법인 성균관[성균관재단]이 있는데, 이는 유교조직을 대표하는 중앙기구이다. 산하조직으로서 각 시도별 향교재단이 있으며, 그 아래 전국[남한] 231개소의 각 지방 향교(鄕校)가 있다. 성균관재단은 그 목적을 도의의 천명, 윤리의 부식, 문화의 발전, 공덕의 작흥 등으로 밝히고 있다. 기본사업은 문묘향사(文廟享祀), 성균관 및 지방향교의 통할관리, 교화 및 사회사업의 경영 및 보조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유도회도 있는데 이것은 유교의 전국적 조직으로서 유교인의 단체이다. 중앙에 유도회총본부가 있고, 각 시도에 본부, 구·시·군에 지부, 통·리·동의 단위에 지회를 둔다.
유교에서는 의례를 중요시 여긴다. 국가의례로서 제천(祭天)의례는 고려 전기, 조선 초의 세조 때 및 대한제국의 성립 후 일시적으로 지냈다. 사직제(社稷祭)와 종묘제(宗廟祭)는 국가의례의 대표적 제사이다. 삼국시대 이후로는 비교적 잘 지속되어 왔으나 일제강점기 사직제는 단절되었고, 종묘제는 전주이씨의 가족의례가 되고 말아 유교적 국가의례로서는 소멸되었다. 성균관·향교의 문묘에서 공자와 선현(先賢)을 제사하는 석전제(釋奠祭)는 유교정신의 계승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중기 이후로 서원의 사우(祠宇)에서도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가 매우 성행했다. 가묘(家廟)에서 조상에 제사하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확립된 유교제례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조선시대에는 4대의 조상에 제사를 드리는[四代奉祀] 전통이 성립되었으며, 가정의례로서 관례(冠禮)·혼례·상례(喪禮)·제례(祭禮)는 광범하게 실천되었다. 안산 지역에서도 유교와 관련한 많은 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안산향교, 오정각, 사세충렬문, 대부도 홍정희 효자문 등이 대표적이다.
[안산항교]
향교는 지방에 있는 문묘와 이에 딸린 교궁(校宮)을 말하는 것으로,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에 석전(釋奠)하는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하여 유학을 강론하는 명륜당 등을 일괄하여 일컫는 말이다. 상록구 수암동에 있는 안산향교가 건립된 것은 1569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훈도 1명과 50명의 학생이 있었다.
[사직단]
사직은 토지신(土地神)과 오곡신(五穀神)을 모시고 제사 드리는 곳으로서, 두 신위(神位)를 함께 단(壇)을 쌓고 봉사(奉社)하기 때문에 사직단이라고 한다. 토지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는 것인 만큼 국가에서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우(保佑)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稷壇)을 설치하였고 각 지방관청 단위로 지방 사직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렸다. 안산의 사직단은 상록구 수암동에 있는 관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산 정상부에 있다.
[오정각]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의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여 사육신과 함께 참형을 당한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충절과 그의 아들 김현석(金玄錫)의 충신정문(忠臣旌門), 손자 김충주(金忠柱), 증손 김경남(金景南), 현손 김약전(金約前)의 효자정문이 각각 봉안되어 있어 오정각이라 불린다. 단원구 화정동에 위치한다.
[사세충렬문]
단원구 와동에 있는 사세충렬문은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과 함께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장의공 김여물 및 병자호란 때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김여물의 4대에 걸친 고부(姑婦)의 애국 충정과 열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하사한 정문(旌門)이다.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신씨(平山申氏), 아들 김류의 처 진주유씨(晋州柳氏),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박씨(高靈朴氏), 증손자 김진표의 처 진주정씨(晋州鄭氏) 등 4세 고부들은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느니 자결할 것을 결심하여 강화도 앞바다에 다 함께 몸을 던져 죽음으로 정절을 지켰다.
[대부도 홍정희 효자문]
효자 홍정희(洪貞羲)는 조선 후기인 1880년대 초 대부도 남도에서 태어난 이름난 효자로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을 다해 봉양했으며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특히 부친이 별세하자 그는 깊이 애통해하며 묘소 앞에 조그마한 여막(廬幕)을 짓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생활하였는데, 그는 육식을 입에 대지 않고 소찬(素饌)으로 일관했으며 한 번도 자신의 집에 내려오지 않는 등 선친의 묘소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효행과 마음가짐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1893년(고종 30) 6월 효자 정문(旌門)이 이곳에 건립되었고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안산시 단원구 대부남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