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화계동에 있는 강득룡(姜得龍)과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충렬각. 「충렬문기(忠烈門記)」에 의하면 강득룡은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인물로 1654년(효종 5)에 부인 경주김씨와 함께 충렬문이 명정되었고, 1719년(숙종 45)에 증질되었다. 지금의 충렬각은 1980년 3월에 진주강씨 문중에서 중건한 것이다. 흥덕구 화계동 새...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閑溪)·청월헌(聽月軒)이다. 강인(姜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이고, 아버지는 강주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김응서(金應瑞)의 딸이다. 부인은 김광수(金光燧)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며, 아들 강선(姜銑)과 강현(姜鋧)도 문과 출신이다. 1627년(인조 5) 정시문과에 을과로...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여수(汝垂), 호는 옥계(玉溪)이다. 강극성(姜克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종경(姜宗慶)이고, 아버지는 현령 강진명(姜晉眳)이며, 어머니는 안봉(安鳳)의 딸 충주안씨이다. 부인은 박유헌(朴由憲)의 딸 함양(咸陽)박씨이다.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소속되었다. 승정원 주서와 성균관 전적 및 병조좌...
-
신라말·고려초에 활동한 청주의 호족. 청주 출신의 호족으로 청주의 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었다. 918년(태조 1) 7월 부장(副將) 연익(連翌)·흥현(興鉉)과 함께 개경에 가서 태조(太祖)를 예방하자 태조는 이들에게 각각 말과 비단을 차등있게 주었다. 이때 견금(堅金)은 개경에 있는 청주 출신 김근겸(金勤謙), 관준(寬駿), 김언규(金言規) 등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
농업 및 공업의 개량과 발전을 지원하고 일반금융과의 조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은행. 1906년 대한제국의 재정과 금융의 전권을 장악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種太郞)의 주도하에 설립되었다. 명목적으로는 대한제국 농공업의 개량 발달에 목적이 있었으나 일본상품의 반입과 식량 및 원료의 반출을 금융적인 측면에서 지원하기 위한 것이 실질적인 목적이었다. 1906년 6월 한성농공은행을...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에 있는 청과물 재래시장. 석교동은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대의 돌다리인 남석교(南石橋)에서 유래한다. 석교동 청과물시장의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다. ‘석교동 청과물시장’ 또는 동(洞)을 생략하고 ‘석교청과물시장’을 혼용한다. 현지 상인들은 통칭 ‘석교청과물시장’이라 부른다. 육거리재래시장의 확장된 형태로 1999년에 개설...
-
소식이나 정보를 정기적으로 인쇄·발행하여 독자에게 전달하는 언론매체. 신문사라는 조직이 뉴스나 정보를 취재·편집하여 신문지면에 인쇄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대중매체의 하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민간인들이 신문사를 설립하여 뉴스를 판매하여 이윤을 얻는 한편 여론을 진작시켜 사회의 의제를 설정하는 등 공익적인 역할을 한다. 근대신문은 정기성, 인쇄성, 공개성, 시의성 등의 요건을...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덕초, 호는 청매당이다. 사인(舍人) 유자빈(柳自濱)의 증손이며, 상의원 별제 유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지조가 고결하였다. 선조 때 영릉참봉이 되었다. 광해군 때에 참봉(參奉)에 음제(蔭除)되었다가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북도 청원군으로 내려와 살았다. 효행이 뛰어났었다. 인조 때...
-
조선 후기의 의관.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일숙(一叔),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고려 때 상장군 진강부원군 유정의 후손이고, 청매당 유명원(柳命元)의 아들이다.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의 병으로 의약을 알기위하여 힘써 노력하여 마침내 의리를 스스로 터득하여 그 신기함을 세상에 알리었다. 그의 의술이 널리 알려져 사족(士族)으로 어의(御醫)가 되었다. 인조대에 천...
-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치운(致雲)이며, 호는 숙옹(塾翁)이다. 아버지는 유지정(柳之程)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이로(利老)의 딸이다. 평생을 고향인 문산(文山)[현 충청북도 문의(文義)]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과 같은 난국에 처하였을 때, 국가를 보위하려 하였으나 제대로 뜻을...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원로(元老), 호는 몽암(蒙菴)이다. 아버지는 예조참의 유인귀(柳仁貴)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현감 이장생(李長生)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년) 진사(進士)가 되고, 1516년(중종 1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官檢閱)이 되고,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朝鮮)에 침입한 왜군(倭軍)과의 전쟁.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朝鮮)에 침입한 왜군(倭軍)과의 전쟁이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은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면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
청주농악은 청주시 강서 1동 지동마을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는 청주지역의 대표적 농악으로 청주시가 지정한 무형문화재 제1호이다. 농악은 농경을 생업으로 하는 농촌의 역사와 그 명맥을 함께 해 온 우리 한민족의 기층문화를 대표하는 종합적 민속예술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농민음악인 것이다. 농악의 기원은 아득한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하늘에 제사를 올릴...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자견(子堅)이고, 거주지는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중훈대부로 개령현감을 지낸 정인형(鄭仁亨)이고, 할아버지는 정호(鄭浩)이며, 아들로는 지평(持平)을 지낸 정사현(鄭思顯)이 있다. 1507년(중종 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유생들을 이끌고 요망한 중...
-
고려 이후 청주목(淸州牧)에 속한 속현(屬縣)의 하나. 진주현(鎭州縣)은 진천(鎭川)의 옛 이름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地理)에 따르면 한주(漢州) 흑양군(黑壤郡)은 달리 황양군(黃壤郡)이라고도 하였다. 본래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흑양군으로 고쳤다. 금물노군(今勿奴郡)은 달리 만노군(萬弩郡), 수지(首知), 신지(新知)라고도 하였다...
-
고려시대의 지방행정제도. 성종 대의 12목, 현종 대~고려 말까지 8목 중의 하나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였으나 국초에는 지방세력이 강대했던 반면 중앙 행정력이 극도로 미약했기 때문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고, 중앙에서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태조(太祖)는 지방세력이 강한 지역에 대한 조치로 주·부·군·현의 칭호를 고치고, 적극적으로...
-
조선시대 청주관아(官衙)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로서 가장 오래된『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신라 685년(신문왕 5)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689년 윤(閏) 9월 26일에 서원경성을 쌓았던 기록이 있어 청주읍성의 전신은 아마도 통일신라가 구주오경제(九州五京制)를 갖추던 신문왕대...
-
청주에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 성씨. 성(姓)은 혈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제정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성을 널리 쓰게 된 것은 고려 중엽부터이다. 성에는 관(貫)이라는 것이 있는데, 적(籍)·본(本)·본관(本貫)·관향(貫鄕)이라고도 한다. 이는 씨족의 근거지가 되는 지명에서 취하여 진 것으로 그 씨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