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0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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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育 |
영어공식명칭 | Education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유화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행위.
[개설]
교육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사회 개조의 수단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은 내부의 자연적 성장의 힘과 외부 영향력과의 합력(合力)에 의하여 성립되는 인간 형성의 작용을 의미하며, 타고난 그대로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참되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승화시키려는 작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삼국 시대의 여수 교육]
삼국 시대에는 원촌현(猿村縣)과 돌산현(突山縣)이, 통일 신라 시대에는 해읍현(海邑縣)과 여산현(廬山縣)이 여수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현재까지 그 치소(治所)가 확인된 바는 없다. 따라서 당시의 교육기관에 대해서도 알려진 내용이 없다. 그러나 거문도에서 당시 중국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중국 문화와 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삼국 시대에는 여수 지역과 관련된 박영규(朴英規)나 김총(金摠) 같은 사람이 견훤(甄萱), 왕건(王建) 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볼 때 지식인들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고 그 바탕에 교육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의 여수 교육]
후삼국 통일 직후인 940년에 전국의 ‘주-부-군-현’의 이름을 개정하였으며, 이때 해읍현과 여산현은 각각 여수현과 돌산현으로 바뀌고, 승평군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1350년(충정왕 10) 처음으로 여수에 현령을 두어 1396년(태조 5)까지 47년간 순천으로부터 독립된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으나, 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에 불복함으로써 승강지법(昇降之法)에 따라 다시 순천에 예속되었다.
이러한 조건을 볼 때 고려 시대 여수 지역의 교육 환경은 열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195년(명종 25)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흥국사를 창건한 데 이어 돌산도에는 은적암을, 금오도에는 송광사를 짓는 등 사찰들이 건립되면서 이 지역 교육의 일부분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 후기 율촌 출신 오흔인이 여수의 현령이 된 점, 문절공 차원부(車原頫)와 공은(孔隱) 등의 유학자가 율촌과 삼일 지역에 은거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들도 여수 지역의 교육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여수 교육]
조선 시대에 여수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기관으로는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향청과 통인청(通引廳), 여수향교, 돌산향교, 그리고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전라좌수영에서는 필요한 인적 자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성안에 통인청을 두어 율학(律學)·산학(算學)·의학(醫學) 등의 잡학을 교육하였으며 교육비는 모두 관비(官費)로 충당하였다.
향교는 당시 여수 지역이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워지지 못하였으나 갑오개혁 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독립된 군(郡)이 설치되면서 1897년(고종 34) 처음 돌산향교와 여수향교가 설립되어 향교가 없던 이 지역의 교육여건을 향상시켰으나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돌산군이 폐지되며 돌산향교 또한 사라질 위기를 맞았으나 유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를 모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후기에 보편적인 초등 교육 기구로 자리 잡은 서당의 직접적 전신은 서재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서재는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으나 초등 교육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수에서도 서당의 시작은 서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웅천 창원정씨(昌原丁氏) 가문에서 설립하였던 가곡재(佳谷齋)는 선원동에 자리한 사원(祠院)이자 정씨 가문의 네 충신을 모신 재실(齋室)이면서 서당이었다.
그 외에 종고산 기슭에 있었던 종명재(鍾鵬齋), 전라좌수사 최환이 세운 봉강동 봉명재, 낙포동에 있었던 여일재(麗一齋), 신월동의 경호재(京湖齋), 화치동의 송천정사(松川精舍)·일수재(日修齋) 등과 고려조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산읍 서덕리의 여산현서당(麗山縣書堂)을 비롯하여 용봉재, 신기서당, 봉화당, 관명재, 큰발개, 서당깍끔과 평사리의 월산서당, 죽포리의 두문향약, 화양면 화동리의 축성재서당, 화련리의 봉양재, 창무리의 창무서당, 이목리의 황의재, 장수리의 수문서당, 용주리의 화교서당, 구미회관의 경의재, 나진의 화성서당 등이 있었다.
[근대의 여수 교육]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세계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학교인 원산학사가 1883년(고종 20) 민중들의 손에 의해 세워졌다. 이후 1895년 7월 「소학교령」을 공포하여 초등교육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소학교의 편제는 3년제의 심상과(尋常科)와 2, 3년제의 고등과로 나누어 실제 수업연한은 5, 6년으로 되어 있었다. 같은 해 8월 학부령 제3호로 「소학교규칙대강」을 공포하여 소학교령에 따른 소학교 교육의 큰 줄기를 제시하였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1899년 4월 「중학교관제」가 공포되어 중학교의 수업연한을 7년으로 정하고, 심상과 4년, 고등과 3년 과정을 두기로 하였으나 실제로 고등과를 설치한 학교는 없었다.
또한 1905년(고종 42)을 전후하여 애국지사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교육으로 민족의 보강을 이룩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자.’라는 신념에서 전국적으로 구국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구국 교육 운동은 교육을 통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정신을 확고하게 심어 줌으로써 우리 교육의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여수시 삼산면에서도 1905년 11월 16일 이 지역 인사로 정부 관리를 지낸 서도리 출신 김상순(金相淳)이 일찍이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원세학(元世學)의 영향을 받아 전라남도에서는 송정리, 목포에 이어 세 번째이자 도서 지역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거문도에 사립 낙영학교를 설립하였다. 낙영학교는 여수 지역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신교육의 장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1906년 통감부 설치 후 대한제국의 교육제도에도 일제의 간섭이 심해졌다. 같은 해 「소학교령」과 「중학교관제」가 폐지되고, 대신 「보통학교령」과 「고등학교령」이 공포되면서 그에 따라 초등교육에서는 종전 6년의 수업연한이 4년으로 단축되었고, 7년이었던 중학교 수업연한도 3~4년으로 줄었다. 일제강점기 직후인 1911년 8월에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는데, 그 결과 초등교육기관은 그대로 보통학교로, 중등교육기관은 고등보통학교로 되었다. 수업연한은 종전과 같이 각각 4년, 3~4년이었고, 여자고등보통학교는 3년이었다. 3·1운동을 겪은 일제는 조선인 교육의 방침을 바꾸기 위해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다. 그리하여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6년으로 하되, 지역에 따라 4~5년으로도 할 수 있게 했다. 또 고등보통학교 수업연한은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 수업연한은 3년에서 4년으로 연장했다.
그리고 1면 1교의 보통학교 설치를 원칙으로 하여 양적으로 이 시기에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여수 지역에도 보통학교 36개교가 설립되었으며, 국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수산 계통 학교로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외에 여자 중학교[여수공립고등여학교, 현 여수여자중학교·여수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어 남녀 중학교의 모양새가 형식적으로 갖추어졌다.
1937년에 중일전쟁,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여 일본어를 일상생활에서 상용하도록 하고,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일본식 성명]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 근로 동원 등을 강요하였다. 여수시 신월리 해군 비행장 건설에는 여수 지역 학생들뿐 아니라 인접 군의 학생들도 근로 동원이란 이름으로 동원되었다.
항일기 여수 지역에 설립된 교육기관은 1900년대는 2개 교, 1910년대에는 5개 교, 1920년대에는 10개 교, 1930년대에는 15개 교, 1940년대에는 6개 교로, 도합 38개 교였다.
[미군정기의 여수 교육]
광복으로 잃었던 주권을 다시 찾은 우리나라는 민주 교육의 재건을 위한 기초를 닦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 명령 제4호」를 발표하여 1945년 9월 24일부터 공립 국민학교를 개교하도록 지시하면서 광복 후 처음으로 우리말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1946년 9월 초등학교의 의무 교육이 전면 실시되었는데, 당시의 미비한 학교 시설로는 도저히 취학 아동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2부제, 심지어는 3부제 운영에 학급 인원도 평균 70명을 상회하는 다인수 학급이었다.
미군정기에 설립된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1945년에 여수남국민학교[현 여수남초등학교], 거문국민학교[현 거문초등학교], 낭도국민학교 적금분교장[여산초등학교 적금분교장으로 2001년 폐교]가 설립되었다. 1946년에는 화정국민학교 제도분교장[폐교], 유송국민학교[폐교], 율림국민학교[1999년 폐교], 화남국민학교[폐교], 안일국민학교[현 안일초등학교], 여수야간중학원[현 여수정보과학고등학교], 여수공립고등중학교[현 여수중학교], 여수중학교[현 여수고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47년에는 광양골약국민학교 송도분교장[현 율촌초등학교로 통합], 낭도국민학교 조발분교장[폐교], 여수공학원[현 여수종고중학교], 여수공학원[현 여수공업고등학교]이 설립되었다.
[현대의 여수 교육]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일어난 여순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학생과 교사가 희생되었다. 1949년 여수읍이 여수시로 승격하면서 여수군이 여수시와 여천군으로 분리되었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학도병으로 많은 학생이 참전하면서, 대부분의 학교는 문을 닫거나 피난지를 전전하면서 겨우 간판만을 걸고 학교 교육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1951년 3월 20일 제2차 「교육법」[법률 제178호] 개정으로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대학 4년의 학제가 확립되어 현재에 이른다. 또한 각급 학교 학기 초를 3월 1일로 하고, 학기 말을 2월 말로 한 이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952년의 교육자치제는 시, 군 단위 자치제로서, 군에는 군 교육구를 설치하고 의결 기관으로 군 교육위원회를, 집행 기관으로 교육감을 두었으며, 시에는 시의회를 의결 기관으로 하고 집행 기관으로 교육위원회를 두었으며 그 사무를 담당하는 교육감을 두었다. 당시 여수시는 6월 4일 여수시교육위원회가 발족하였으며, 여천군교육위원회는 6월 5일 발족하였다.
여수시 교육감은 6월 8일, 여천군 교육감은 8월 28일 부임하여 교육 자치의 문을 처음 열었으나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1962년 법률 제1435호로 교육자치제가 폐지되고, 여수시교육위원회는 각각 여수시와 여천군에 흡수되어 교육과를 신설하고 교육 행정을 시장, 군수에게 맡겼다.
1964년 1월 1일 교육자치제가 부활하면서, 교육자치제는 전라남도교육위원회만 두고, 시·군에는 교육장을 둔 교육청으로 변경되면서 같은 해 5월 1일 여수시 교육청과 여천군 교육청이 재발족하였다.
1971학년도에는 전국적으로 실시된 무시험 추첨에 의한 중학교 진학 제도를 도입하면서 중학교 교육이 빠른 속도로 팽창하였지만 고교 진학을 위한 입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여수시에도 많은 학교가 생겨났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설립된 초등 교육기관 중 2021년 현재 폐교된 35개의 학교를 제외하면 초등 교육기관으로 돌산중앙국민학교[현 돌산중앙초등학교], 화태국민학교 두라분교장[현 화태초등학교 두라분교장], 미평국민학교 오만분교장[현 여수북초등학교], 소라남국민학교 신흥분교장[현 소라초등학교 신흥분교장], 산수국민학교[현 율촌초등학교 산수분교장], 쌍봉남국민학교[현 소호초등학교], 여수동국민학교 종고분교장[현 종고초등학교], 서국민학교 구봉분교장[현 진남초등학교], 경호국민학교[현 경호초등학교], 돌산국민학교 백초분교장[현 백초초등학교], 여수봉산국민학교[현 여수봉산초등학교]가 있으며,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여천남중학교[현 돌산중학교], 봉강학원[현 진성여자중학교], 삼일중학교[현 여수삼일중학교], 거문중학교, 여양중학교, 여남중학교[현 여남중고등학교], 화양중학교, 화정중학교 개도분교[현 여수개도중학교], 여수구봉중학교, 여수중앙여자중학교, 여천돌산중앙중학교[현 돌산중앙중학교]가 있다. 고등 교육기관으로 여양실업고등학교[현 여양고등학교], 여향실업고등학교[현 진성여자고등학교], 여수중앙여자고등학교가 있다.
1982년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이 시행되면서 여수 지역에서도 섬 지역의 분교장들이 본교로 통합되면서 초등학교의 수가 많이 줄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는 「지방 교육 자치에 관한 법률」[법률 제4347호, 1991년 3월 8일 제정]이 공포되면서 임명제였던 도 교육감이 민선으로 선출됨에 따라 시, 도 단위의 교육자치제가 시행되고, 이에 따라 시, 군의 교육 자치 단체장은 시, 도 교육감이 임명하게 되었다. 또 교육청의 명칭도 변경되면서 여수시 교육청은 전라남도 여수교육청, 여천군 교육청은 전라남도 여천교육청으로 변경되었다.
1997년 「전라남도 여수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의 제정」[법률 제5457호, 1997년 12월 17일 제정]에 따라 여천시 및 여천군, 여수시가 1998년 4월 1일부로 통합 여수시로 출범함에 따라 전라남도 여천교육청을 전라남도 여수교육청으로 통합하고, 청사를 구 전라남도 여천교육청사로 이전하였다. 2014년 폐교된 자산초등학교 부지에 신청사를 지어 이전한 후 현재에 이른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반까지 입시 경쟁의 과열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학생들이 늘어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한 범시민 운동이 일어났고,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령 제828호가 공포되면서 고등학교 평준화를 이룩하였다.
공교육의 획일적인 교육 커리큘럼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학습 능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학교 형태로 혁신학교[전라남도에서는 전남혁신학교]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여수 지역에서는 2021년 현재 6개의 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다. 또 2010년부터 ‘내 고장 학교 보내기’ 캠페인을 통해 타 지역 진학률이 4년 연속 감소하기도 하였다. 또 농촌 인구와 학생 수는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지만 여수 지역에서는 다문화 학생이 계속해서 늘고 있어 다문화 교육도 함께 시행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여수 지역에 설립된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폐교된 4개의 학교를 제외하고 2021년 기준으로 여수구봉국민학교[현 여수구봉초등학교], 여도국민학교[현 여도초등학교], 여수여문국민학교[현 여수여문초등학교], 여수남산국민학교[현 여수남산초등학교], 여수양지국민학교[현 여수양지초등학교], 여수한려국민학교[현 여수한려초등학교], 여천북국민학교[현 무선초등학교], 여수서산국민학교[현 여수문수초등학교], 여천소호초등학교[현 소호초등학교], 여수부영초등학교, 여천시전초등학교[현 시전초등학교], 도원초등학교, 여수좌수영초등학교, 안심초등학교, 신기초등학교, 동백초등학교, 성산초등학교, 웅천초등학교, 죽림초등학교, 여수송현초등학교가 있으며,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진남여자중학교, 화양남중학교[현 화양중학교 화양남분교장], 쌍봉여자중학교[현 여선중학교], 충덕중학교, 여남중학교 화태분교장[현 화태초등학교돌산중학교 화태분교장], 여도중학교, 여수문수중학교, 무선중학교, 안산중학교, 여수웅천중학교가 있다. 고등 교육기관으로는 돌산실업고등학교[현 여수해양과학고등학교], 여천화양고등학교[현 여수화양고등학교], 한영고등학교, 여천고등학교, 여천전자화학고등학교[현 여수석유화학고등학교], 여수충무고등학교가 있다.
[현황]
2021년 현재 여수시의 교육은 ‘배움의 공동체 함께 만드는 혁신여수’라는 목표 아래 배움이 즐거운 당당한 학생, 자율과 책임의 안전한 학교, 지원과 공감의 청렴한 행정, 따뜻하고 평등한 교육 복지, 소통과 협력의 교육 자치를 5대 교육 지표로 삼고 있다. 또한 기초 학력 책임 교육, 미래를 준비하는 수업 혁신, 지속 가능한 미래 학교 육성을 역점 과제로 두고 있으며, 특색 사업으로 여수 교육 국제화 특구 운영을 시행하고 있다.
2021년 현재 여수시에는 유치원 72개, 초등학교 64개, 중학교 26개, 고등학교 15개, 특수학교 1개[여수여명학교], 대학교 2개[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 한영대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