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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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海岸地域甕器生産-中心地盈德 |
영어공식명칭 | Pottery of Yeongdeok-gun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언 |
[정의]
동해안 지역 옹기의 생산과 옹기점의 확산에 기여한 영덕의 옹기 장인과 옹기점 이야기.
[개설]
옹기는 전통사회에서 살림살이의 절반을 차지하였을 정도로 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였다. 원거리 유통이 불편했던 전통사회에서 옹기의 생산은 점토와 목재 공급의 용이성과 인접한 소비 지역을 배경으로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국 곳곳에 옹기를 생산하는 옹기점이 분포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영덕 지역의 일부 옹기마을은 옹기점이 밀집되어 옹기의 생산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곳 중의 하나였다.
1970년대부터 옹기류를 대신한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과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 거주가 늘어나면서 옹기의 수요가 현저히 줄어들기 이전까지 영덕 지역의 옹기 생산은 동해안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나아가 현재 옹기의 생산과 보급에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울산광역시 지역에서 옹기마을이 형성되는 것에 영덕 지역 옹기 장인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영덕 지역은 한동안 동해안 지역에서 옹기 생산의 중심지였고, 당시 활약하였던 옹기 장인들이 옹기의 생산과 전승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해안 지역 옹기점의 시대별 분포와 특성]
경상도 동해안 지역의 울진군, 영덕군, 포항시, 경주시, 울산광역시 지역에서 옹기점이 자리한 촌락의 분포를 근대 이전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살펴본 한 연구에 의하면 전 지역에서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60년대까지 옹기촌의 분포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덕군에서는 동해안 지역에서 옹기촌의 감소 추세가 뚜렷하였던 1980년대에도 비교적 많은 옹기촌이 존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옹기촌의 분포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높았으나, 옹기의 생산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가장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옹기촌의 수효보다는 옹기촌에 분포한 옹기 가마의 형태와 수효를 고려하면 가마의 밀집도가 높고, 생산성에서 앞선 개량 가마의 보급이 보편적이었던 1950년대 이후에 옹기의 생산량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가마를 비롯한 옹기 제조의 새로운 기법의 도입과 광복 이후 해외 동포의 귀국 및 6.25전쟁 등의 정치 사회적 요인도 옹기 수요의 증대에 영향을 미쳐서 당시 옹기의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옹기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쳤던 가마의 형태는 흔히 ‘대포굴’로 알려진 기다란 통굴의 형태를 이룬 재래식 가마와 재래식 가마를 칸칸이 나누어 연결한 ‘칸칸이 가마’로 알려진 개량식 가마, 그리고 현대화된 셔틀식 가마 등으로 구분된다. 옹기의 수요가 가장 높았던 시기에는 칸칸이 나누어 연결한 개량식 가마가 보편화되었는데, 재래식 가마에 비해 생산성이 크게 앞섰다. 개량식 가마를 이른 시기에 도입한 곳이 옹기 생산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으며, 영덕 지역이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영덕 지역 옹기촌의 시대별 분포와 특성]
한 곳의 읍과 여덟 곳의 면으로 구성된 영덕군에는 전통시대에서부터 거의 모든 면 단위에 옹기촌이 있었다. 이 중에서 일부 지역은 옹기촌이 집중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영덕읍의 화개리와 구미리, 그리고 지품면의 삼화리, 오천리, 구읍골은 각기 반경 2㎞ 이내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옹기촌에서 여러 옹기점이 있었다는 점에서 옹기 생산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영덕 지역의 주요 옹기촌에 있었던 옹기 가마의 시기별 현황에 관한 연구에 의거해 옹기점의 밀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옹기 가마의 밀도를 고려하면 모두 10기의 가마가 분포한 지품면 오천리가 가장 높으며, 역사를 고려하면 조선시대부터 옹기를 생산한 지품면 삼화리가 가장 오래되었다.
영덕 지역에서 개량식 가마는 일제강점기 말엽인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반에 설립되었으며, 지품면 삼화리와 축산면 도곡리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곳에서 개량식 가마가 도입된 계기도 유사하다. 조선시대부터 옹기점이 있었던 지품면 삼화리에서는 일제강점기 말엽에 유기를 비롯한 쇠붙이를 공출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사기그릇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가마 형태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당시 사기그릇을 제작할 목적으로 삼화리에 사기 제작용 가마를 설립한 것이 개량식 옹기 가마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축산면 도곡리에서도 사정은 유사하였는데, 도곡리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사기그릇과 유사한 형태의 소규모 옹기를 생산한 가마를 가리켜 ‘사바리굴’이라 하였다. 이 가마의 형태가 마치 개량식 가마를 축소해 놓은 듯하였고, 나중에 ‘사바리굴’을 확대한 것이 개량식 옹기가마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허동포와 그의 두 아들인 허덕수와 허덕만은 도곡리뿐만 아니라, 영덕 일대 몇몇 옹기점의 가마를 재래식에서 개량식으로 변경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영덕 지역에 위치한 도곡리와 삼화리 이외의 옹기촌인 지품면의 오천리와 구읍리, 영덕읍의 화개리와 구미리, 그리고 달산면 흥기리의 옹기촌에서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인 1950년대 동안 개량식 가마를 사용하는 옹기점이 설립되었다. 이들 허씨 부자는 영덕 일대에서 영남의 해안과 내륙 지역, 나아가 전국에 개량식 가마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동해안 지역에서 영덕 지역 다음으로 개량식 가마가 일찍 설립된 곳은 울산 지역이며, 이곳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개량식 가마를 사용하였다. 울산 지역에서 개량식 옹기 가마의 설립과 관련하여 허덕만의 역할이 컸다.
[영덕 지역의 주요 옹기촌]
영덕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옹기촌은 지품면 삼화리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부터 운영된 재래식 가마에서 옹기를 생산해 오다가 일제강점기 동안에 개량식 가마가 도입되었다. 옹기 생산의 절정을 이루었던 1960년대에는 두 기의 개량식 가마가 새로 설립되는 등 옹기 생산이 활성화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모두 폐점되었다.
영덕 지역의 주요 옹기촌 가운데 삼화리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은 축산면 도곡리이다. 이곳은 동해안 지역에서 가장 이른 일제강점기 말엽에 개량식 가마가 설립되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개량식 가마를 설립한 옹기 장인들이 이후 다른 지역으로 개량식 가마를 확산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진 국도 제7호선 변에 있는 도곡리 옹기촌은 현재 구한말 영덕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 유적지가 있는 곳과 그 부근에 옹기굴이 있었다.
영덕과 울산 지역에서 활약한 일부 옹기 장인들에 의하면, 일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허동포가 도곡리에서 식기용 옹기를 제작하기 위하여 원래의 재래식 옹기 가마를 개조하여 사기그릇을 제작하는 가마와 유사한 형태의 가마로 변경한 것이 개량식 옹기 가마의 시초로 기억하고 있다. 허동포가 개량식 옹기 가마를 설립한 이후 도곡리에는 5기의 개량식 옹기 가마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옹기 생산의 재료인 흙의 조달이 원활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옹기의 주요 수요지가 변화함에 따라 1970년대에 모두 폐점되었다.
영덕읍 화개리는 1950년대 초반에 허동포의 아들인 허덕만에 의해서 처음으로 옹기점이 설립되었다. 이후 4기의 옹기 가마에서 6곳의 옹기점이 운영되었다. 당시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옹기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재래식보다 생산성이 좋았던 개량식 가마를 조성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춘 허덕만 일가가 영덕 일대에서 옹기점을 설립하는 것이 용이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가 이곳 옹기점의 전성기였으며, 생산된 옹기는 주로 부산 지역으로 판매되었다.
영덕 지역에서 옹기점이 가장 밀집한 곳은 지품면 오천리이다. 이곳에는 한때 10기의 옹기 가마를 이용하였던 15곳의 옹기점에서 옹기를 생산하였다. 오천리는 영덕 지역뿐만 아니라, 여타의 지역에 위치한 옹기촌에 비하여 옹기점의 밀도는 높지만, 옹기를 생산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곳이다. 오천리에서 옹기점이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당시는 옹기의 수요가 급증하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옹기점의 설립이 활발하였다. 이곳에서 옹기점이 설립되는 데에도 허덕만이 관여하였다. 이곳에 옹기점이 밀집되었기 때문에 옹기 생산에 관여하는 사람들로 번잡하였다. 외지에서 온 40여 명의 장인들과 현지 주민 20여 명 등 모두 60여 명이 옹기를 생산하는 데 관여하였다. 이 밖에도 옹기점에 땔감을 조달하거나 운반 및 유통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합하면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옹기 생산에 관여한 셈이다. 또한 옹기를 생산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술과 잡화를 판매하는 주점이나 상점도 옹기촌에서 빠트릴 수 없었다. 그 밖에도 오천리에는 옹기 장인이 아니면서 사업의 번성을 위해 옹기점을 설점한 점주가 많았다. 이처럼 오천리는 영덕 지역에서 옹기 생산의 중심지였다.
[영덕 지역 옹기의 특성]
영덕 지역의 여러 옹기촌의 옹기점은 해안 지역에 있었음에도 생산하는 옹기는 해안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지 않았다. 원래 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옹기에는 어촌이나 어가에서 사용하는 옹기 생산이 하나의 특징이었다. 대표적인 어촌의 옹기로 젓갈을 담는 옹기가 있다. 그 밖에도 어선에서 사용하기 위한 옹기나 어구용 옹기가 있다. 예컨대 요동이 심한 선박에서 사용할 옹기는 파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높이가 낮고, 두께가 두꺼워야 하였다. 또한 문어를 포획하기 위한 문어 단지도 해안지역 옹기점에서 주로 생산하는 옹기 가운데 하나였다.
가정마다 식해(食醢)를 담는 영덕 지역에서는 ‘수박단지’라 하여 식해용 옹기도 있었다. 해안 지역에서는 바다 생선과 민물고기를 절이는 간독이 있었는데, 특히 영덕 지역에서는 오십천에서 잡히는 황어를 절이기 위해 간독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해안 지역의 옹기점은 일반적인 옹기류와 함께 주민의 생활문화를 반영한 특정의 옹기를 생산하였다. 그런데 영덕 지역 옹기점에서는 해안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옹기보다 부산 등 주로 도시의 살림살이에 필요한 옹기를 우선적으로 제작하였다. 1950년대 이후 부산에 급증한 피난민을 비롯한 도시의 지역민들이 생활에 필요한 옹기, 특히 마실 물을 담아 둘 물단지를 많이 제작하였다.
[동해안 옹기 생산의 중심지로서 영덕]
영덕 지역의 옹기점은 옹기의 생산과 관련된 새로운 방식의 개발과 보급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해안 지역에서 옹기 생산의 선도적인 역할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동안에는 영덕 지역의 옹기점에서,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울산 지역의 옹기점에서 담당하였다. 영덕과 울산 지역이 옹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기까지 영덕 지역에서 활약했던 허덕만의 역할이 컸다.
허덕만은 1950년대 후반에 영덕의 오천리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는 한편, 전국 각지로 개량식 가마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울산광역시 웅촌면의 옹기점에 관여하면서 외고산에 옹기점 설점을 시도하였다. 1950년대 말엽에 허덕만이 외고산에 옹기점을 설점한 이래 외고산마을에는 1960년대 동안 옹기점이 크게 늘어났다. 외고산에서 옹기 생산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 초반에는 옹기 가마만 12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옹기 대장만 70여 명이 있었으며, 건애[대장이 그릇을 성형할 수 있게 바닥과 토래미를 만들고, 움집으로 옮기는 작업 인부)는 30~40명, 그 밖에도 흙을 다지는 인부와 불을 다루는 화부 등 옹기 생산에 관여하는 주민만 100명이 훨씬 넘었다. 외고산리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전국 최대의 옹기 산지가 되었다.
이상에서처럼 허동포와 두 아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옹기 생산 기술의 혁신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개량식 옹기 가마를 시도하고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기법의 도입과 실험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의 기업가적 정신과 자세를 갖추어 시대 변화에 적응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옹기촌이 된 외고산의 옹기점에서 실현되고 있다. 이것이 전통문화의 발전적 계승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장인으로서의 정신과 자세는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