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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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邑內里山城 |
영어공식명칭 | Ubnaerisa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관동리산성(館洞里山城)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산1-1 일원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강원종 |
현 소재지 | 읍내리산성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산 1-1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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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산성 |
양식 | 마안봉(馬鞍峰) 형식 |
크기(높이,길이,둘레) | 762m[둘레]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에 자리하고 있는 삼국시대 산성.
[개설]
읍내리산성은 백제 때 난등량현(難等良縣)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백제시대 산성이다.
[건립 경위]
읍내리산성의 역사 문헌기록은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의하면 ‘高山面 館洞里, 土城址 周圍 約二百五十間, 겨우 隆起하여 城壁의 痕迹을 남길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전영래 교수가 1960년대에 조사한 『전북 고대산성조사보고서(全北 古代山城調査報告書)』에서는 관동리산성으로 보고되었는데, 성 내부 평탄지에서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 등이 다량 확인되었으며, 이로 인해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치]
완주군 봉동읍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대둔산(大屯山) 방면으로 가다 보면 고산교차로에서 고산면 소재지로 들어가게 되면 동쪽에 해발 130.8m 능선이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다. 읍내리산성은 이 산의 정상부와 평탄지에 축성(築城)되어 있으며, 읍내리산성의 북동쪽으로는 만경강과 고산천이 합류하고 있다.
[형태]
읍내리산성은 북쪽의 해발 130.8m의 봉우리와 남쪽의 121.3m의 봉우리를 길게 감싸고 있으며, 그 평면 형태는 거대한 배[船] 모양에 가까운 장타원형(長楕圓形)이다. 신관호(申觀浩)의 『민보집설(民堡輯說)』에 의하면 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잘록하게 낮은 지형과 같은 마안봉(馬鞍峰) 형식에 가깝다. 그리고 두 봉우리 사이에는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어 건물 등이 입지하기에 유리한 곳이다. 서쪽 성벽은 경사가 완만한 곳으로써 토석혼축(土石混築)[흙과 돌을 섞어 쌓는 방식]으로 쌓았고, 동쪽 성벽은 만경강(萬頃江) 변과 접하여 깎아지른 절벽으로 석축을 하였는데, 지형에 따라 축조재료를 혼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현황]
읍내리산성 내부에는 백운사가 있으며, 성벽은 밭으로 경작되거나 새로 개설된 도로로 인해 파괴되어 알아보기 힘들다. 성문은 해발 130.8m 봉우리의 북쪽 성벽에 한 곳, 북동쪽 만경강 변과 접하는 곳에 한 곳 등 2개소의 성문지(城門址)가 추정되고 있으며, 수구지(水口址)[성밖의 샘에서 성안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장치]도 2개소 정도 알려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의 성 내부 평탄지에는 다량의 백제시대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통일신라시대 기와 조각 등이 산재해 있다. 특히 많은 기와 조각에는 외면(外面)에 승문(繩文)[새끼줄 무늬]과 선문(線紋)[줄 무늬]이 타날(打捺)[점토 안에 들어 있는 공기를 빼내고 토기 벽을 단단하게 두드리는 작업]되어 있고, 내면(內面)에는 통 쪽 흔적이 잘 관찰되고 있는데, 이러한 기와는 백제시대의 제작기법으로, 읍내리산성의 축조는 백제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읍내리산성의 남-북 길이는 320m, 동서 너비는 110m 내외이며, 전체 둘레는 762m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읍내리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고산(高山)에는 백제 때 난등량현이 있었고, 757년(경덕왕 16)에 고산현으로 개칭(改稱)되어 전주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1018년(현종 9)에 전주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읍내리산성은 백제 때부터 지방행정을 담당하였던 치소성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