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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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浦洞-堂祭文書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덕묵 |
[정의]
경기도 시흥시 포동 새우개에서 행해진 당제의 비용 등을 적은 문서.
[개설]
포동 새우개에는 당집과 느티나무, 은행나무로 구성된 신목(神木)이 있다. 새우개에서는 음력 정월과 7월에 주민들이 모여서 당제(堂祭)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풍어(豐漁)를 기원했다. 주민들은 제당(祭堂)을 신성시하여 당집 옆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당집 주위의 나무를 자르지도 못하게 하였다. 약 10가구당 한 사람씩 '주비'라는 직책의 사람을 뽑아 제비(祭費) 걷우기를 맡겼으며, 그 밑에는 '소염'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을 두어 실제로 돈 걷는 일을 시키고 당제를 위한 물을 져 준다든가 다른 심부름을 시켰다.
제일(祭日)이 결정되면 다음날 우물 청소를 하였다. 제의(祭儀) 전날에 제주(祭主)는 목욕재계를 하고 제주와 그를 돕는 4명의 보조자들은 첫날부터 3일간 당제가 끝날 때까지 당집에 머물며 청소를 하고 제사 음식을 만든다. 이 기간 마을 사람들은 당집 근처에 접근하지 못한다. 둘째 날에 '조라'라는 감주(甘酒) 비슷한 술을 만들어 저녁에 당에 올린다. 이것을 '피고사'라고 부른다. 삼일째인 제일에는 새벽 1시나 자정쯤에 치성을 드린다. 당제사에서 메[제사 때 신위(神位) 앞에 놓는 밥]는 스물네 그릇을 올리며 제사를 받는 신들은 새끼줄에 창호지를 걸어 놓은 '걸립'이라는 것으로 상징되어 있다.
당 및 당제의 유래가 깊고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포동 새우개 당제에는 일제강점기의 당제 관련 문서가 보존되어 있어 당제의 역사를 보여 준다.
[제작 발급 경위]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당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축문, 당제 시 소요된 비용을 적은 문서, 당제를 준비하기 위해 시장에서 구입한 물품 목록, 당사(堂祠)의 비품 목록, 당제 시에 추렴금 목록 등이 보존되어 있다.
[형태]
창호지에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여 각종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
[구성/내용]
1923년 당제 시 소요된 제수 및 비용을 순서대로 적은 “대정12년 음 정월 초삼일 당사 시 소용기(大正十二年陰正月初三日 당사시쇼용긔)”는 당시의 당제 실체를 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23년의 기록은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형식을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 1930년 부천군 소래면 포리(浦里)와 국동(局洞)[지금의 시흥시 포동]의 당제 참여 가구 수 및 호당 추렴 액수, 총수입 및 지출, 도당제(都堂祭)[도당굿]의 직임을 적어 놓은 “경오 정월 초삼일 도당신사 시 용하기(庚午正月初三日禱堂神祠時用下記)”, 1930년 당시의 포리와 국동의 전 호수를 기록하여 각 가호(家戶)가 도당제에 어떠한 역할을 맡았는지를 알 수 있는 “소화5년 경오 음 정월 일 포리 호수 씨명 절목(昭和五年庚午陰正月日浦里戶數氏名節目)”도 일제강점기 당제와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 1933년 포리에서 혼상계(婚喪契)[혼인과 장례 시 부조하기 위한 계 모임]를 조직하면서 발의한 내용과 절목(節目) 및 계원 명단을 수록한 '입의론(立儀論)'도 마을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의의와 평가]
시흥시 포동은 해안가이며 어부들은 고기잡이가 중요한 생계 수단이다. 바다에 나가 뱃일을 하는 어부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당제를 정성껏 모셨다. 이런 점에서 포동 새우개 당제는 내륙의 당제와는 다른 문화적 가치와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 포동에 보존되고 있는 「포동 새우개 당제 문서」는 일제강점기의 당제 및 마을 관련 기록물이다. 이 문서는 앞선 시대인 조선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동제(洞祭)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서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