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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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茂芝內洞胎封 |
영어공식명칭 | Mujinae-dong Taeshil |
이칭/별칭 | 태봉(胎峰),태실(胎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방문식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8년 - 무지내동 태봉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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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90년 5월 4일 - 무지내동 태봉 시흥시 향토유적 제6호 지정 |
소재지 |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무지리[지금의 시흥시 무지내동] |
성격 | 태(胎) 봉안소 |
[정의]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에 있는 조선시대 갓난아이의 태를 묻었던 석실.
[개설]
태봉(胎封)은 태실(胎室)이라고도 하며 태반을 묻는 장소 혹은 태를 봉안(奉安)하는 것을 뜻한다. 태봉은 본래 왕족의 태반을 묻은 석실(石室)인데, 왕실의 자손이 태어나면 일정한 의식과 절차에 따라 태를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여 관련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태봉의 절차와 형식 그리고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출산 후, 태를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넣는다. 항아리는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하고 붉은 끈으로 밀봉한다. 이 항아리는 더 큰 항아리에 담는다. 이 항아리에 보관된 태는 태봉지를 선정하여 묻는데 이것을 안태(安胎)라 한다. 태봉지가 정해지면 궁에서는 태봉출(胎奉出) 의식을 행하였다. 태봉지까지 가는 일행을 안태사(安胎使) 행렬이라 하는데, 이들이 태봉지에 도착하면 해당 지방관들이 태봉 봉안 의식이 끝날 때까지 지원하였다. 태실의 형태는 대개 대석(臺石), 전석(磚石), 우상석(湡裳石), 개첨석(蓋檐石) 등으로 만들었다.
왕세자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금표(禁標)를 세웠다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가봉(加封)하면서 내부와 주위에 석물(石物)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국왕 태실은 8명의 수호 군사를 두어 관리하였으며 태실 주변은 접근을 제한하였다.
[변천]
태(胎)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 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소중히 여겨 길지를 골라 태실로 탯줄을 보관하였다. 길하고 복스러운 땅을 점지하는 것은 풍수와 관련이 있으며, 이에 태봉의 조성 동기 및 입지는 과거부터 풍수지리 관념과 결부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지리업(地理業)의 과거 시험과목 중에 『태장경(胎藏經)』이 있었다. 이 문헌은 현존하지 않으나 안태(安胎)와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김유신(金庾信)의 태를 태령산(胎靈山)에 안치했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음양학자 정앙(鄭秧)이 상소를 올려 풍수지리적 시각에 따른 태를 안장시키는 방법을 고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태실 제도가 성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보다 세분화되어 풍수 명당지를 3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왕, 2등급은 대군, 3등급은 왕자의 태실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위치]
무지내동 태봉은 이미 태실 제도가 확립되고 세분화된 이후인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를 넣은 항아리와 석함(石函)은 분실되어 태의 주체와 연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태봉이 발견된 정황과 위치에 따라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태실 입지의 서술에 따르면 평지에 솟은 둥그스름한 봉우리 머리맡에 태를 안장한다고 하였다.
무지내동 태봉은 1988년 시흥군 소래읍 무지리 산15-12[지금의 시흥시 무지내동]에서 발견되었는데, 태실이 입지한 곳은 사방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구릉지 정상부 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시흥시에도 풍수 지명과 풍수 설화, 읍치(邑治), 제의적 경관의 구성 요소인 사직단(社稷壇) 터, 성황사(城隍祠) 터 등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어 관련된 시각에 힘을 실어준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무지내동 태봉은 1988년『시흥군지』의 지명 유래를 집필하기 위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주민의 제보로 확인되었으며 1998년 기전문화재연구원[지금의 경기문화재연구원]의 지표 조사로 다시 확인되었다. 암반층을 지름 2.5m, 깊이 2m로 파낸 후 그 속에다 석함을 묻었다. 석함은 대리석 석재로 지름 85㎝, 높이 47㎝, 두께 16㎝이다. 본래 석함에 넣었을 항아리와 태지석함(胎誌石函)은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구조상 왕실의 태실은 아니고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태실지(胎室址)로 보인다.
[현황]
1990년 무지내동 태봉이 있는 곳에 육군 부대와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되어 태봉이 군 영내에 있게 되었다. 그 후 정밀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상세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시흥 관내에는 모두 세 곳에 태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칠리제저수지에서 서쪽으로 금이동 가는 길목에 있었고, 거모동 군자초등학교 앞 태봉에도 있었다. 금이동 태봉은 묘소 설치 등으로 훼손 및 분실되었고, 거모동 태봉 역시 묘소 설치 후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의의와 평가]
무지내동 태봉의 입지와 조성 동기는 풍수와 관련이 깊다. 사람이 나고 자라고 죽는 생애 의례와 관련된 시작은 풍수적인 기복 신앙과 관련이 깊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을 음양오행(陰陽五行)과 화와 복으로 인식하고 이에 따라 복지(福地)를 선택한 것이다. 태봉과 관련된 의례와 입지 선택 과정은 복지를 선점함으로써 공간의 좋은 기운을 모아 행복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과거의 인식이 고루한 것만은 아니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장소는 햇빛이 잘 들고 물을 얻기 쉬운 곳으로 낙점되어 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풍수 사상이 현대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가치는 자연과 더불어 살기 좋고 쾌적한 주거 공간으로 가꾸어지길 희망한다는 점이다. 태봉 또한 과거 사람들의 살기 좋은 곳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살핌으로써 지역사회의 공간적 인식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