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675 |
---|---|
한자 | 東門洞鄕校-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향교골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향교골에서 1970년대 초까지 김매기를 공동 작업으로 수행하던 조직.
[개설]
향교골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살아온 마을이다. 근래에 서산시의 팽창과 함께 대부분의 전답이 도심으로 잠식되었지만 본래 마을 앞에는 드넓은 문전옥답이 펼쳐져 있었고, 한때는 13가구에서 머슴을 거느릴 정도로 손꼽히는 부촌이었다. 게다가 기름진 농토와 물 사정도 좋아 벼농사에는 더없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향교골에서는 모내기를 마치고 한 달 남짓 지나면 마을 구성원들이 두레를 조직하여 김매기를 했다. 이러한 사실은 1899년에 제작된 용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원]
동문동 향교골 두레는 총 책임자인 영좌(領座)를 비롯, 작업 현장에서 김매기를 주도하고 두레꾼을 통솔하는 공원(公員)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밖에 두레에 필요한 비품과 식사 및 간식 조달을 담당하는 유사(有司) 2인, 하루의 작업량과 두레꾼의 품값을 기록하는 문서, 혼인을 하지 않은 노총각 중에서 우두머리인 총각영좌, 담배 심부름과 술심부름 등을 맡은 꿩배[꽁배] 등으로 구성되었다.
[김매기]
동문동 향교골 두레의 김매기는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약 일주일 간격으로 아시매기, 이듬매기, 만물 세 번을 매는 것이 원칙이었다. 작업을 할 때는 목청이 좋은 소리꾼이 “얼카뎅이야 잘 넘어간다”로 시작되는 선소리를 메기면 두레꾼들은 후렴을 받아 넘기며 흥겹게 일을 했다.
[현황]
동문동 향교골 두레는 1970년대 초반에 중단되었다. 그 무렵 제초제와 농기계, 비료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두레를 조직하여 김을 매는 전통적인 공동 노동의 관행은 자연스레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