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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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門洞鄕校-龍大旗 |
이칭/별칭 | 용대기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향교골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강성복 |
제작 시기/일시 | 1899년 -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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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장처 |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 -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31 마을회관 |
성격 | 두레의 용대기 |
재질 | 명주 |
크기(높이,길이,너비) | 287㎝[가로]|250㎝[세로] |
소유자 | 동문동 향교골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향교골에서 두레의 농기로 제작한 기.
[개설]
서산시 동문동 향교골은 1574년(선조 7) 군수 최여림에 의해 서산향교가 이건해 온 마을이다. 이로 인해 교하촌(校下村)의 성격을 띠고 형성된 이 마을은 교동 또는 향교골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는 1899년(광무 3)에 두레의 농기로 제작한 기로, 용이 그려져 있어 속칭 ‘용대기’라고 한다. 지난날 벼농사를 주로 했던 향교골에서 매년 김매기를 위한 두레가 나면 용대기를 앞세우고 다녔던 마을의 상징이었다.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에는 ‘광무삼년기해육월일(光武三年己亥六月日)’이라고 묵서되어 있어 1899년 기해년 6월에 김매기를 위한 두레를 조직하면서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용대기에는 당시 두레의 역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는 197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는데, 과거 서산 읍내에서는 가장 ‘어른기’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때문에 두레가 나거나 풍물놀이의 현장에서 다른 마을의 농기와 마주치면 반드시 기세배를 받았다고 하며, 다른 지역에서 두레기를 제작할 때는 으레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마을에서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용대기에 먼저 술 한잔을 올렸다고 한다.
[형태]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는 명주로 제작된 직사각형의 기로, 깃봉에는 꿩장목을 꽂고 그 밑에는 총을치 수염으로 장식하였다. 크기는 가로 287㎝[지내발 제외], 세로 250㎝[양측 수술 제외]이다. 또한 깃발의 상하에는 길이 60㎝쯤 되는 흰색 수술 5개가 각각 달려 있고, 맨 끝에는 삼각형 흰색 지네발 7개[길이 35㎝]가 덧붙여져 있다.
기폭의 바탕은 물을 상징하는 검푸른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주황빛 여의주를 왼발에 쥐고 포효하는 황룡의 자태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용의 머리는 눈·코·입은 물론 사슴뿔을 닮은 뿔과 수염, 이빨까지 자세하고, 몸체는 비늘과 꼬리, 네 발과 발톱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용의 몸통 사이에는 구름을 형상화한 운문(雲紋)이 그려져 있어 한눈에도 비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황룡의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그 밑에는 또 한 마리의 작은 용이 황룡을 따라 승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는 19세기 후반 자연촌 단위로 조직된 두레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료로서 학술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기폭에 두레의 역원 명단과 독특한 팔괘의 문양이 그려진 용대기는 서산 지역은 물론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로 충청도 지역의 두레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